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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현석 Oct 31. 2023

헌 물수건


  흑칠판을 닦으려고 수건을 집어 들었다. 이 헌 물수건은 하얗고 얇은 긴 면 소창을 1/3 정도 잘라 만든 것으로 물감이 묻혀져 있고 천이 다 헤어져 너덜너덜하고 보기 흉하다. 몇 년 동안 사용하였을까? 곰곰이 따져 보니 10년 전 내가 수채화를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사용했던 수건이었다. 그 물수건은 올해 1학년 담임 맡기 전까지 우리 집 창고에서 4년 동안 고이 모셔 두었던 소중한(?) 그래서 꽤 오랜 시간 동안 버려지지 않은 물건이었다.

 

 1학년 교실 오르간 위에 놓인 너덜너덜하여 그 어디에도 필요로 하지 않아 버릴 것만 같았던 이 헌 물수건의 용도는 무엇일까? 바로 흑칠판 닦는데 쓰는 것으로 그 용도로는 아주 최고다. 꼭 필요할 때 쓰이는 최고의 칠판 닦이용 물건이다. 


  아무 쓸모없을 것만 같았던 헌 물수건으로 색분필로 곱게 단장한 흑칠판을 사정없이 닦아내니 곱디고운 칠판 그림은 사라지고 검고 검은 칠판만 눈에 확 들어오게 만들어 주는 나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국보급 물건이다. 그것은 흑칠판에 숫자, 그림, 글씨로 쓰여진 것들과 새로운 내용을 위해 언제라도 깨끗하게 닦을 준비가 되어 있는 항상 준비된 자랑스러운 나의 교육용사이다.


  그리고 이에 따르는 아이들 역시 색분필로 예쁘게 단장할 수 있는 검은 흑칠판 같은 느낌의 존재들이다. 색과 색이 어울려 아름다운 예술적인 작품이 돼 듯 아이들 영혼은 사람과 사람이 모여 하나의 어울림을 칠판에 새겨지는 것 같은 아이들의 세상 작품들이 된다. 글씨나 숫자를 배울 때 나만 모른다고 오만가지 인상을 다 짜가며 뻐덩기며 울고 있던 아이와 몇 년 동안 어린이집에서 닳디 닳은 우정으로 친구를 도와준다며 난리인 것이다. 가만히 놔두며 지켜보고 있으면 우리의 진보주의자들인 미래의 시장님들은 난리도 아니다. 문제 해결 했다고 해맑은 웃음으로 나에게로 다가오는 아이, 도와주었다고 자랑하는 아이, 어떻게 도와주었는지 훤히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며 아주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보수주의 담임. 그래서 교실풍경은 과거와 미래, 진보와 보수가 어우러진 아주 작은 세상이다. 


  내가 온통 보수주의 일색으로 수업을 해 나간다면 아이들에게 보수주의를 강요하는 것이고, 내가 만약 아이들에게 진보만 강조한다면 배움 또한 이루어지지 않으리. 그러다 보면 아이들은 조화로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다.


  조화와 균형을 잘 아는 것은 중요하다. 아이들에게 맞는 진보적인 생각은 리듬이었고 예술이었고 노래와 시와 움직임이다. 보수적인 선생님은 변화지 않는 모범적인 말과 행동, 완고한 사랑이다. 서로 결합되었을 때 무엇인가 싹이 트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진보/미래적인 아이들이, 보수/과거적인 사람에게 신뢰를 통해 보수를 껴안는 다면 아주 큰 사랑을 펼쳐 보일 것이고, 세상의 조화, 배움의 기쁨을 줄 것이다.


  이래서 우리 모두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배워 나가는 것 같다. 어른의 지식들을 나의 내면에 변형을 거치지 않고 전달해 주는 방식으로는 미래의 시장님이 되실 우리 아이들에게는 한낱 쓰레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 앎의 지식들을 목적에 알맞게 쓰여진다면 교사의 가르침은 아이들에게 배움의 행복을 줄 것이다. 


  서서히 보수주의로 변해 가고 있는 나는 항상 안정되고 잘 되기만을 바라는 현실주의자이다. 나의 살아왔던 방식의 고집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이젠 힘이 들기에 현실에 안주하며 편안한 교육을 해 온 것은 사실이다. 생각과 행동은 늘 상극이었다. 


  정제되지 않는 말과 행동으로 투닥 되며 새로움을 향해 나가는 진보주의 아이들은 또 일러바치고 또한 쉽게 화해도 잘한다. 이렇듯 교실은 조용할 날이 없지만 항상 공평하게 대해 준다고 나를 믿고 신뢰한다. 요 녀석들은 학교문집 실을 내용으로 선생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고 하니 이렇게 답한다.     


 “ 선생님! 근육 빵빵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 선생님은 너무 사랑스럽고 상냥해요. 대통령이 되면 좋겠어요.”

 “ 선생님 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리고 천하장사가 되어 모든 사람에게 인기가 많으면 좋겠어요.”

  “ 선생님도 1학년 아이였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헌 수건 같은 나를 새 수건으로 나의 나태해지는 오래되고 흠이 많은 영혼을 깨끗한 마음으로 닦아 주며 항상 간직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헌 수건은 처음 깨끗하고 완전한 용도의 수건이었다. 그러나 이젠 너덜너덜하고 닳아 없어지는 자유를 가진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그 목적은 다른 용도로 훌륭하게 변했다. 이제 낡을 대로 낡아진 헌 수건은 더 이상의 완벽함을 잃고 자유롭게 다른 용도로 쓰여진다. 


  자유로움에서 응집력으로 가는 방식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연결 지어진다. 굳어지지 않으려면 나에게도 뭔가 자유로움이 생겨야 한다. 아이들과 내가 함께 호흡을 하려면 나의 정신은 이보다 훨씬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소통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아이가 대답한 말대로 서로의 호흡을 통해 소통하고자 한다면 나도 1학년 아이여야 한다. 자유로운 진보는 건전한 보수를 향해, 굳어져 가는 보수는 자유로운 정신을 향해 서로의 좋은 흐름으로 이 세상을 건설하자는 영혼의 외침을 직감한다.


  버리지 않기를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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