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학적 시선으로 다시 묻는 교육의 자리
루돌프 슈타이너의 강연을 반복해 읽으며,
교육은 방법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임을 점점 더 분명히 인식하게 됩니다.
아이를 감각적으로 드러난 대상에 머무는 존재로 볼 것인지,
아니면 감각을 넘어선 차원을 지닌 존재로 볼 것인지에 따라
교육의 방향은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아이를 초감각적 존재로 이해한다는 것은,
아이를 성취나 행동 같은 눈에 보이는 기준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그 이면에 진행 중인 내적 성장과 가능성을 함께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이는 아이를 분석하고 설명해야 할 대상으로 대하는 태도에서
한 걸음 물러나,
아이의 말과 행동을 하나의 표현이자
어른에게 건네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관점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아이가 어려움을 보일 때,
문제를 규정하고 고치려 하기보다
지금 이 아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어른인 내가 어떤 태도로 관계 맺어야 하는지를 먼저 묻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변화의 중심은
아이가 아니라 교사와 부모 자신에게 놓이게 됩니다.
초감각적으로 아이를 바라본다는 것은
지금 드러난 모습이 이 아이의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 위에서,
각자의 속도와 길을 존중하며
기다릴 수 있는 교육적 태도를 지니는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사의 역할은
지식을 조직하고 사고력을 훈련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교사 자신의 내면이 먼저 형성되어야 합니다.
신념과 깨어 있는 지각,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가 축적된 내면 없이는
아이를 온전히 만날 수 없습니다.
사고 중심의 지적 교육은 분명 일정한 성과를 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전체를 다루는 교육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정신적 차원을 고려하지 않는 교육은
아이의 성장에서 가장 결정적인 영역을
비워 둔 채 진행됩니다.
그 결과는 효율적일 수는 있으나,
풍요롭지는 않습니다.
교사가 아이를
정신세계로부터 이 세계에 도달한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교육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가 됩니다.
이 태도는 필연적으로 경건함을 동반합니다.
아이 앞에 선다는 것은
가르치는 행위 이전에
이미 하나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교육이 숭배의 차원에 이른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라,
존재를 대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교육이 남긴
결과의 빈곤함을
나는 오랜 시간 현장에서 보아 왔습니다.
인간을 기능과 성취로 환원할 때,
교육은 성과를 생산하지만
의미를 생산하지는 못합니다.
아이들은 성장하지만,
깊어지지는 않습니다.
참된 교육은
정신과학에서 출발할 때
비로소 생산적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산성이란
결과의 양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교육은 아이를 변화시키는 행위이기 이전에,
교사가 스스로를 끊임없이
형성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퇴직 이후에야
나는 비로소 나의 교육을
철학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아이들을 가르쳤으되,
존재로서 충분히 대하지는 못했다는
반성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반성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을 향합니다.
교육은 한 생의 직무가 아니라,
여러 삶을 관통하는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삶이 허락된다면,
나는 더 오래 준비된 교사로
아이 앞에 서고 싶습니다.
나의 사유와 행위가
정신적 존재인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끊임없이 자각하는 교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교육은 직업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가장 엄격한 방식이라는 이 확신을,
이제 나의 교육철학으로 남깁니다.
이러한 사유의 끝에서,
루돌프 슈타이너가 남긴 한 문장은
오래도록 교사의 명상적 문구로
새겨질 만합니다.
교사의 자아는 아이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고,
교사의 영혼은 아이의 생명력에 영향을 미치며,
교사의 생명의 힘은 아이의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
이 문장은 교육이
단순한 전달이나 기술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의 존재 전체가
아이에게 작용하는 사건임을
분명히 일깨워 줍니다.
무엇을 가르치느냐보다,
어떤 사람으로 아이 앞에 서 있느냐가
더 근본적인 교육의 조건임을
말해 줍니다.
결국 교육은
아이를 바꾸는 일이기 이전에,
교사가 스스로를 형성해 가는 길이며,
그 길 위에 서 있는
교사의 삶 자체가
이미 교육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