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함' 외국에서 한국인이 버려야 할 미덕
해외 생활할 때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가 아마 멘탈을 부여잡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30대에 막차를 타고 워킹 홀리데이를 오다 보니, 20대 때 가졌던 막연한 해외 생활의 환상보다는 현실적인 고민들이 좀 더 크게 와닿는다. 애초에 이런 현실적인 걱정이나 고민들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면 한국에서의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테고, 오기 전에 정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와서 그런지 (독서, 명상, 사색하면서 나의 내면과 대화를 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생각이 들려고 하거나 완벽주의 성향이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릴 때면, 그 고리를 끊어내려고 하는 중이다.
아무래도 지금 가장 나의 큰 걱정거리는 직장과 나의 커리어인데, 사람이 참 간사한 게, 분명히 회사를 다닐 때는 영국에 가서 5-6월 상반기까지 여유롭게 쉬면서 구직하기로 해놓고선 막상 또 백수라는 사실 + 2년 임시 비자를 가진 외노자 신분을 생각하니 한없이 불안하고 일을 얼른 다시 하고 싶다. 일반적인 한국에서의 이직이 아니라, 나라도 바뀐 데다 직무도 바꿀 예정이다 보니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나름 주류로 살아왔다면 여기서는 완전히 소수 그룹(동양인 여자)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에 내가 헤쳐나가야 할 수많은 장애물들에 압도되는 중이다. 한국에서는 업계 인맥도 많았고 이직이나 새로운 일을 하는 데 사실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인맥도 없는 데다 맨땅에 헤딩하다 보니 다시 대학교 취준생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그리고 또 다른 걱정거리는 언어이다. 한국에서 나는, 처음 보는 사람과도 금세 친해질 수 있었고 시답잖은 농담으로 친구들 웃기는 게 낙이었다. 그러면서도 깊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면서 친목을 쌓는 편이었고 직장에서도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 협상하며 일하는 직무였다. 즉, 나만의 언어, 화술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장점 중에 하나였다. 근데 여기서는 그 모든 것을 영어로 해야 하다 보니 나의 가장 강력한 비장의 카드 하나가 사라진 느낌이다. 아무리 영어를 곧잘 하는 편이어도 한국어를 구사하는 깊이와는 차원이 다르니까. 나는 나만의 언어로 사람들을 홀리는(?) 사람인데 어쩔 수 없이 여기 현지인들과는 한계가 있다. 아마 이들은 내가 굉장히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의 이 센스와 위트를 보여줄 수 없어서 너무 속상하다. 흑. 물론 살다 보면 점차 나아지겠지 싶으면서도 언어의 장벽 때문에 나의 True Colour를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답답하고 조바심이 나는 건 사실이다.
요즘 즐겁게 지내면서도 이런 생각들 덕분에 자신감 그래프가 난데없이 하향 곡선을 그리던 오늘, 같이 사는 언니에게 이런 내 생각들을 가볍게 툭 털어놨다. 근데 언니가 정말 좋은 말을 해줬다.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다 하루는 10점 만점 중에 스스로에게 몇 점을 줄 수 있냐며 서로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언니도 나도 자존감 빼면 시체인 사람들이라 둘 다 스스로에게 9점을 주고서는 서로 깔깔거렸는데 언니가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운을 뗐다.
너는 너 스스로를 10점 중에 9점이라고 평가했잖아. 근데 왜 영국에 왔다고 해서 갑자기 너를 9점보다 더 낮은 곳에 두려고 해? 한국에서 네가 이룬 것들을 생각해 봐. 너를 채용하는 회사는 너로 인해서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될 거고 그게 회사에 큰 이득이 될 텐데? 절대 주눅 들지도 말고 조바심 난다고 해서 기준을 낮추지도 마. 너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는 곳에 가서 일하고, 그런 사람들만 곁에 두면 돼.
언니의 말에 정답이 있었다. 영국에 와서 내 사회적 위치가 바뀌었다고 해서 나의 '진짜 점수'까지 낮출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해외 생활하면서 특히나 겸손함이 미덕인 한국인들이 간과하기 쉬운 부분인 것 같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동양인 여자라고 해서, 비자 Status가 제한적이라고 해서 기준을 낮출 필요도 없고 타협할 필요도 없다.
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나 지나친 낙천주의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내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고 남들에게 없는 내 경력, 경험들을 쌓았으니 그것을 잘 풀어내서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다시 한번 멘탈을 부여잡아야겠다. 2022년 올해는 기죽지 말고! 자신감 하나로 똘똘 뭉친 내가 되어야겠다고 다시 다짐한다.
늘 그래 왔듯이 나는 어떻게든 길을 찾아낼 것이고 이 글을 다시 읽으며 웃어넘기는 순간을 꼭 만들어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