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후세시 May 18. 2022

가시밭길 행복하게 걷기

해외 생활은 To live가 아닌 To survive


4월 26일 최종 면접 이후 3주간의 정말 괴로운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다. 여전히 내 팔로업 메일을 (개)무시하는 HR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3주간 기약 없이 기다리면서 배운 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첫째도 둘째도 '인내심' 이었다. 그동안 내려놓는 법을 정말 많이 연습했다.


그리고 딱 3주째가 되던 어제, 마지막 메일이다 생각하고 반 협박성 메일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인터뷰어 중 한 명이었던 부회장에게 최종 팔로업 메일을 보내면서 HR을 CC에 넣기로 했다. (이게 바로 코리안식 협박이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너네 아직도 날 채용하고 싶은 거니?라고 물었다. 아침 8시 30분이었다.


그리고 기분 좋게 친구와 브런치 약속이 있어서 나갔는데, 오후 12시 30분, 거짓말처럼 음식이 나오기 직전에 HR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말 이ㅅㄲ는 타이밍도..) 결론은, 정말 안타깝지만 나와 최종으로 비딩하던 다른 후보자가 최종으로 됐다는 내용이었다. 단전에서부터 깊은 빡침이 올라왔다. 그러면 진작에 이야기해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는 그렇게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그동안 얼마나 바빴으며, 회사 상황이 지금 정신이 없고, 최종 후보자들 사이에 경쟁률이 너무 치열해서 결정을 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못해서 떨어진 게 절대 아니고, 정말 마지막까지 힘든 결정이었고 나의 최종 프레젠테이션은 amazing 했다면서 당시 피드백을 갑자기 읊어주기 시작함. 그리고 그동안 수고해주었는데 단순히 거절 메일 보내는 것보다는 전화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래 그래서 그동안 내 메일을 그렇게 씹었니...?


가만히 듣는데 화도 안 났다. 사실 정말 그동안 많이 내려놔서 충격적인 소식도 아니었고, 떨어진 것은 물론 아쉽지만, 떨어진 것 자체가 화가 난다기보다는 기다리는 사람 생각하지 않고 3주나 아무런 피드백 없었던 그들의 태도에 너무 화가 났다. 그래도 프로페셔널하게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고 했고 Wish you all the best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친구한텐 아무 티 내지 않고 브런치 먹으면서 수다 떨고 집으로 왔다.


막상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최종으로 탈락 통보를 받고 나니, 갑자기 현실의 벽이 크게 다가왔다. 영국에 온 지 3개월 차고, 모아 놓은 돈은 점점 줄어가는데 또다시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SJ 언니 집에 얹혀살면서 최종 합격하면 혼자 살 집 알아봐야지~~ 했었는데 혼자 살 집은 무슨, 더 이상 얹혀살 수는 없으니 셰어 하우스라도 당장 구해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랴부랴 당장 입주할 수 있는 셰어 하우스를 찾기 시작했고 한 달에 950파운드(한화로 150만 원) 짜리 집에 이번 주 일요일부터 들어가기로 했다. 한 달에 150만 원을 내면서 화장실과 주방을 셰어해야 하다니. 와 실화인가? 영국에 와서 안일하게 살았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한 달에 놀고먹는데만 1,000-1,500파운드(한화로 약 200만 원)는 우습게 썼었는데 막상 지금 계산기를 두들겨보니 지금 갖고 있는 현금으로 (지금 소비에서 절반을 줄였을 때) 겨우 3개월 정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내 주변에는 런던에서 고군분투하는 친구들이 꽤 있다. 얼마 전에 영국에서 오래 산 SJ 오빠의 말들이 생각났다. 영국에서는 한국식의 gut feeling(감)을 믿으면 안 된다고 했다. 막상 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눈앞에서 갑자기 엎어지기도 하고(지금의 내 경우) 반대로 이야기해서 정말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기회가 오기도 한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은 18년 동안 런던에 살았고 지금은 시민권자가 되었지만, 항상 마음속에는 런던에 산다는 것은 To live(사는 것)가 아니라 To survive(살아남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와 지금 누구보다도 저 말이 너무 와닿는다. 나는 영국에서 그냥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여기서 어떡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


슬퍼하거나 실망할 겨를도 없이, 지금부터라도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지금 이 글도 쓰는 중. 부모님한테도 탈락 소식을 말씀드렸더니 부모님이 그랬다. 넌 그동안 꽃길만 걸어왔었는데 이제서야 가시밭길로 처음 들어간 거라고. 그리고 내가 이런 경험을 하게 된 것에 오히려 감사한다고. 지금 이 기회를 통해서 앞으로 더 많이 성장할 거라고. (우리 부모님은 정말 정말 너무 멋진 분들이다.) 정말 맞는 말이다. 지금도 솔직히 많이 불안하고 기약 없는 미래에 두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고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니, 기꺼이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려고 그동안 회복탄력성(Resilience)를 길러왔던 거니까.


차분한 마음으로(난 프로페셔널 하니까) 오늘 오전에, 그동안 면접을 보았던 부회장과 매니저에게 마지막 메일을 썼다. 탈락 소식은 아쉽지만, 그래도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고 새로운 후보자와 앞으로 더 잘 되길 바란다고. 그랬더니 그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


Thanks for your note. Sorry, it didn’t work out for you but competition for this role was fierce. Nonetheless, you made an excellent impression in the interview process as well as your preparation and creative approach to the brief.

From your personality perspective, I admire your perseverance and courage to step out of your comfort zone and jump into a new world in London. It speaks for your personality and entrepreneurship. I’m sure the next opportunity lies ahead and will fit your aspirations.

You have shown a great attitude towards our company. 
All the best in your next endeavours,


그래. 나는 comfort zone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존나 멋진 사람이다. 떨어진 덕분에 이런 글도 쓰게 되고 말야. 여러모로 많이 배우고 좋은 경험을 한 것 같다. 이 모든 게 나의 경험과 내공이 될 것이다. 담금질 열심히 하면서 진짜 꼭 여기서 멋지게 살아남아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해외 생활할 때 마음가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