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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진 Dec 03. 2024

5살의 무구


창피함을 아는 나이


한창 슬라임에 빠져 있던 시절, 집 근처에 생긴 슬라임 카페에 놀러 갔다. 이제 키즈 카페는 조금 시시해진 나이. 슬라임의 재미를 도통 이해할 수 없지만 아이의 취미는 존중하기로 한다. 아이 역시 이해 안 되는 어른들의 세계가 있겠지. 슬라임은 내 어릴 적 놀이와 굳이 비교하자면 칼라 점토와 비슷하다. 손으로 조물조물 만지고 빚다가 갑자기 모든 색을 다 섞어서 똥색(?)으로 만드는 흐름까지 왠지 닮았다. 아이는 예민한 기질치고는 손으로 탐색하는 놀이를 늘 좋아했다. 모래 놀이터에 가면 시간도 잊은 채 모래 범벅이 될 때까지 놀았고, 엄마표 놀이 중에서도 가루 놀이나 반죽 놀이를 가장 좋아했다. 전자든 후자든 뒤처리는 늘 나의 몫. 아이가 크면서 다양한 놀이를 접할수록 육아의 많은 비중을 ‘치우기’가 차지했다.


슬라임은 엄마들이 피하고 싶은 놀잇감 중 하나다. 슬라임의 주 성분은 물풀이다. 물풀에 식염수를 섞기도 하고 로션을 섞기도 하고 심지어 쉐이빙폼까지 섞으면서 손으로 가지고 논다. 집에서 슬라임을 갖고 노는 날이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다. 책상, 식탁, 바닥… 집안 곳곳에 물풀이 질퍽하게 묻는다고 상상해 보면, 왜 엄마들이 슬라임을 기피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돈을 투자해서라도 슬라임 카페에 가는 이유다.


슬라임 카페에 가면 엄마는 잔소리 안 해서 좋고, 아이도 눈치 안 보고 다양한 재료를 갖고 놀 수 있어서 서로의 정신 건강에 좋다. 평소 잘 못 놀게 한 게 미안해서 괜히 더 지갑을 열고 이것저것 사 준다. 액체도 고체도 아닌 끈적한 물체가 눈앞에 휙휙 지나간다. ‘어릴 때 슬라임이 있었다면 나도 이렇게 좋아했을까?‘ 분명 칼라 점토는 좋아했는데 지금은 바닥에 묻을까, 얼굴에 튈까, 옷에 떨어질까 걱정이 앞서 손대기를 꺼린다.


슬라임 카페에서 한참을 놀다가 집에 갈 시간이 되어 정리했다. 역시나 아이 바지에 슬라임이 떨어져 얼룩이 생겼다. ‘바지 하나 또 버렸군.’ 그 순간 아이는 바지에 슬라임이 묻어서 창피하다고 했다. 누가 보고 오줌 싼 줄 알고 오해할까 봐 걱정된다고 했다. 모래를 뒤집어써도, 진흙 범벅이 되어도, 물에 홀딱 젖어도 창피한 줄 모르고 놀던 아이가 이제는 창피함을 말한다. 불과 몇 개월 전에는 모르던 감정. 얕지만 분명하게,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이가 오기 전에, 놀기 전부터 치울 걱정이 앞서는 나이가 오기 전에 더 마음껏 놀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사랑한다는 말


다섯 살 아이는 매일 자기 전 “엄마, 사랑해 ”라고 말한다. 그 순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재우기에만 급급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고 아이에게 미안해진다. 참 흔한 말이지만 쉽지 않은 말.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아무런 계산도 망설임도 없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아이의 무구함이 부럽다.


나도 저 나이 때는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곧잘 하는 아이였을까? 최대한 어릴 적 기억으로 거슬러 내려가봐도 그런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어버이날 편지의 가장 마지막 멘트로 썼던 기억이나마 어렴풋하게 남아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낸 기억은 없다. 나 역시 부모님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애기 때 많이 해주셨다면 기억 못 해서 죄송해요) 모난 것 없이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이었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게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모두 어색한 일이다.


남편과 연애 때도 그랬다. 매일 사랑하지만 사랑한다고 자주 말하지 못했다. 표현이 후한 남편에게는 늘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 받았으니 돌려줘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떠밀려 어색하게 말했던 세 글자.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입 안에서 간질간질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녹아 삼켜진 “사랑해”가 셀 수도 없다. 그런 내게 매일 사랑을 말하는 일상이 생길 줄이야. 하루 끝에 “사랑해”를 주고받는 일이 평범한 일상이 됐다.


다섯 살, 유독 아이가 많이 성장한 일 년이었다. 이제 자식이라기보다는 작은 친구에 더 가깝다.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알아주고 나의 슬픔을 위로할 줄 아는 친구. 안경 낀 채 침대에 널브러져 있으면 내 안경을 벗겨주고 이불까지 덮어주는 내 작은 친구. 피곤한 나를 대신해 강아지 아침밥을 챙겨주며 “엄마는 조금 더 자도 돼 ”라고 말해주는 작은 친구. 하루도 빠짐없이 “사랑해 엄마”라고 말해주면 ‘앗, 오늘도 내가 한 발 늦었군’하며 괜스레 미안함이 든다.


앞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보다 아이 스스로 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겠지만 아직은 좀 더 응석을 받아주고 싶다. 나의 울타리 안에서 한 발짝 더 멀어져 가겠지만 언제든 돌아와 편히 쉴 수 있도록 울타리를 더 단단히 만들어 두고 싶다.




미래에서 온 육아 일기

매주 금요일 연재 중


육아를 하면서 느낀 단상을 적습니다.

‘아이가 나를 키운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10년 차 엄마의 자아 성찰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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