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하면서 아이의 유치원을 옮겨야 했고, 나는 직장에서도 훌쩍 멀어졌다. 새로운 유치원에 대한 걱정과 더 길어진 내 출퇴근 시간을 생각하며 답답해하던 시기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늦겨울, 새 유치원에 상담하러 갔을 때 선생님은 이런 말을 건넸다. “어머님 혼자가 아니에요. 저희가 도울 수 있는 건 함께할게요.” 그 말에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워킹맘이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유치원 선생님이 1순위다. 회사에 급한 용무가 생겼을 때 갑자기 남편을 퇴근시킬 수도 없고, 급하게 지인에게 요청하기도 어렵지만 선생님께는 덜컥 의지하게 된다. 아이를 함께 키워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좋은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참 감사한 일이다.
이런 나의 안도와는 반대로 아이는 유치원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유치원에 가는 걸 싫어했다. 그러다 내가 외근으로 일주일 내내 바빴던 때를 기점으로 등원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은연중에 아이에게 등원 거부 원인을 물었지만 잘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자려고 누워 있는 정말 뜬금없는 타이밍에 유치원에서 싫었던 일, 힘들었던 일들을 슬그머니 말해주었다. 대부분은 친구가 불편하게 했거나 간식이 마음에 안 들었거나 등등. 그런 요인들을 줄여주고 전보다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자 점차 잘 적응하는 것 같이 보였다.
잡지사에서 일하는 내게는 매달 마감이 있다. 옛날처럼 철야나 야근은 없지만 마감 기간이 되면 개인의 대소사는 뒷전이 된다. 약속된 발행일에 잡지가 나오는 것만이 공동의 목표. 그래서 그 기간에는 비상 대비 태세다. 퇴근을 목전에 앞두었다가 일이 틀어지기도 부지기수. 아이 하원 시간을 놓치는 일도 매달 반복됐다. 친정 부모님, 시부모님, 형제, 집 근처 지인에게까지 SOS를 청해 급하게 아이 하원을 부탁한 적이 많다. 남편은 업무 특성상 갑작스러운 퇴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예 선택지에 없다.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아이의 등하원을 매번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게 부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빠도 아이의 하원을 위해 조기 퇴근하는 게 이해받는 세상이 오길 바랐다. 그렇게 주변 가족들에게 매번 부탁하기도 힘들어지면 선생님께 머리를 조아린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이번엔 상사에게 머리를 조아릴 차례. “먼저 퇴근해서 죄송합니다!” 그 사이 아이는 텅 빈 교실에서 깜깜한 저녁을 맞는다. 4살 아이에게 이해를 바라기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를 데리러 가자마자 건네는 첫마디도 사과다. “엄마가 늦어서 미안해.”
이번 마감 기간 때는 딱 하루 아이를 늦게 하원시킨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가 데리러 가겠다는 약속을 끝내 못 지키고 유치원이 끝날 때까지 날 기다리다가 결국 아빠가 데리러 간 날이다. 가장 일어나지 말아야 할 최악의 시나리오. 그날을 기점으로 등원 거부는 훨씬 심해졌다. 엄마가 안 올 수도 있다는 극도의 불안감으로 인해 엄마와 떨어져 유치원에 가는 행동 자체에 거부 반응을 일으킨 것 같다.
등원 시간이 다 됐는데 꿈쩍 않는 아이를 억지로 끌고 나온 적도 많고, 꿈쩍 않는 아이에게 엄마는 출근해야 하니까 혼자 집에 있으라면서 문을 잠그고 나가버린 적도 있다. 문 여는 법을 아직 모르는 아이가 자기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작은 손으로 처절하게 대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지금도 가끔씩 떠오른다. 회유와 협박이 오가는 등원 시간은 매일이 전쟁터. 유치원 앞에서 웃으며 엄마와 헤어지는 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웠다. 너는 왜 그렇게 못 하냐며 속으로 아이를 수없이 질타했지만 혹여나 그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올까 뜨거워지는 목구멍을 꽉 막았다. 아이 잘못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울며 들어가는 아이에게 당부를, 선생님께는 부탁을 하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면서 남편에게 한탄의 메시지를, 회사에는 오늘도 조금 늦는다는 사과의 메시지를 동시에 보낸다. 가슴을 누르는 무거운 돌덩이들 사이로 겨우 숨을 몰아쉬다가 덜컹거리는 지하철에 몸을 맡긴 채 잠시 눈을 붙이는 게 일상이 됐다.
아이가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쉽게 상처받지 않고 강하면서도 유연한 사람이 되길 바라지만 사실 진짜 강해져야 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아이처럼 펑펑 울 수 없어 이불에 누워 혼자 눈물을 훔치던 날도 많았다. 때로는 약해지고 싶으면서도 한없이 강한 엄마가 되고 싶은 양가적인 마음에 내내 혼란스럽다. 등원을 거부하는 아이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일과 육아에 치이는 나의 사정을 누구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다는 서러움에 그 화살은 늘 아이에게로 향했다. 내일은 좀 더 따뜻하고 현명한 말로 아이를 이해시키고 싶다. 불쑥 튀어나오려던 모진 말들을 힘껏 억누르고 싶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주고 싶지 않다. 수년간 딸로서 다짐했던 말들을 이제는 엄마로서 다짐한다.
등원 거부는 이후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반복했다. 언제나처럼 “시간이 약”이라는 진리를 되새기며 버티고 버텼다. 초등학교 입학 후 1년은 더 지나야 스스로 웃으며 학교에 간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과연 위안이 될까, 절망이 될까. 등원 거부는 10년 간의 육아 중 나를 가장 힘들게 한 이슈가 분명하지만, 사실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아이였다는 걸 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좀 더 현명한 방법으로 아이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다.
매주 금요일 연재 중
육아를 하면서 느낀 단상을 적습니다.
‘아이가 나를 키운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10년 차 엄마의 자아 성찰 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