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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 리뷰] 프리센스 Princesse

인형의 집엔 공주를 위한 궁전은 없다.

인형의 집에 공주를 위한 궁전은 없다. 폭력에 익숙해진 세상을 부끄러워한다.


남성, 여성이라는 것을 넘어서 우리는 모두 다 같은 '인간'이다. 여자이기에 집안일에 책임을 져야 하고, 어떠한 사건에 대한 견해가 없고, 가정적이어야만 하며 배우자에게 자신의 의견과 입장을 무조건 동일시해야만 한다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가. "여자"라는 틀과 "남자"라는 틀에 가두기 전에 우리 모두 생각과 감정이 있는 인간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 사람을 소유할 수 있을까?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까? 사랑, 우정, 그로 인한 사람들은 나의 장식품이 아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물론 이것은 반려 동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을 소유할 수 없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결혼했다는 전제로 내 배로 낳았다는 핑계로, 배우자가, 자녀들이 누군가의 소유물이 절대 될 수 없다. 이 영화는 익숙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두려움을 가지긴 한 여자의 아픔에서 시작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하다, 한 여성이 매일 오두막에 갇혀 외부의 늑대가 끔찍하게 변형된 얼굴을 더 손상 할까 두려워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갑갑한 현실의 돌파구로 Princesse 소설책 속 해피엔딩을 꿈꾸는 그녀지만, 애석하게도 오두막을 찾는 건 멋진 사내인 폭력적인 늑대이다.


남편인 남자는 매일 저녁 돌아와서 강압적, 폭력적인 같은 일과가 반복한다. 그녀는 그의 차에 곰 인형의 털을 집어넣는 작은 복수를 반복할 뿐이다. 어느 날 저녁 그는 다친 금발 여성을 집으로 데려오고, 그 여성을 통해 이 여자는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남편이 털을 넣은 차를 먹고 쓰러지자, 금발의 여성과 옷을 갈아입고는 밖으로 나간다. 깨어난 남편은 익숙한 듯 처음 했던 것처럼 금발의 여성에서 강압적, 폭력적인 행위를 하고 나간다. 금발의 여자는 익숙함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창가에 보이는 늑대의 모습에 놀라 몸을 숨긴다. 그녀의 눈에 발에 신지 않은 신발 한 짝이 보인다. 그녀에게도 이제 희망이 있어 보인다. 


사람의 폭력은 언제나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향한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폭력으로 이기려 하는 것은 아마도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단순한 폭력의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거대한 권력에 대항하는 상대적으로 약한 이들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그리고 그 일들이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벌어지는 것도 그 싸움은 물리력과 물리력의 대결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 보여주는 여자에 대한 남성의 강압적인 폭력(?)은 그 개인과 개인의 폭력이 결국은 사회적인 폭력의 연장선에서 벌어지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폭력의 모습은 결국 집단이 그리고 사회가 약한 누군가를 약하다는 이유 만으로 짓밟는 것에서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두 명의 폭력의 희생자를 다룬다. 첫 번째 여자는 이미 늘 있는 폭력에 익숙해져, 감각도 없는 여자와 새롭게 폭력에 감염되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둘 다 나가려고 하지만, 창문 밖에서 자신들을 위협하는 무언가 때문에 나가지 못한다. 그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을 쓰러뜨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밖으로 나가는 걸 두려워한다. 그녀들의 상처는 그들의 주홍 글씨와도 같다. 지울 수 없는

그 흔적은 그녀들을 세상에 나가는 두려워한다. 그래서 첫 번째 여자와 두 번째 여자는 서로의 옷을 바뀌어 입는다. 마치 새로 태어나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녀는 나간다. 두 번째 여자는 나가지 못한다. 이 폭력에 익숙해지고, 감염돼서 나갈 수 없다. 그녀 또한 변신이 필요하다. 그런 그녀에게 신지 않은 신발이 보인다. 그녀에게도 나갈 희망이 보일 수 있다. 


외모는 현대사회에서 그야말로 타고난 경쟁력이 되는 것이다. 외모조차 현대사회에서는 경쟁의 영역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경쟁하는 사람들은 욕망이 획일화되고, 욕망이 획일화 되면 경쟁이 더더욱 가속화된다. 영상 대중매체(TV 등)가 보급되면서 외모에 원래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하면서 오로지 외모만으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 해진다. 영화는 끔찍하게 변형된 얼굴이라는 설정 역시 주홍글씨 때문에 세상에 손가락질, 비난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녀들은 인형의 집 로라처럼 벗어날 수 없다. 


폭력이 폭력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진짜 진리일지도 모른다. 결국, 세상의 모든 폭력은 스스로 안전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때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이 대물림되는 것은 그런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때려본 경험이 없는 이들은 타인을 때리는 것을 주저하게 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그 모든 폭력은 결국 그 폭력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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