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
낯선 괴수와의 사랑을 담은 <킹콩>이나 <미녀와 야수>, 혹은 흔한 크리쳐물로만 규정짓기엔 너무 감각적이거나 낭만적이고, 그렇다고 낭만의 꿈결에 젖어있는 <라라랜드>같은 달콤한 영화로 규정짓기엔 기괴하고 낯설며 파괴적이다. 분명 이 영화를 보며 <킹콩>도, <라라랜드>도 떠올랐지만 이 영화가 어떤 '한 부류'로 규정되기엔 들어갈 공간이 턱없이 비좁다. <셰이프 오프 워터 : 사랑의 모양>은 이처럼,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 쉽지 않은 영화다.
흔히들 우린 어느 것들을 쉽사리 '규정'하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그 '규정'의 단계가 지나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규정의 수단은 주로 '말'로써 외부로 내뱉어진다.
"넌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는구나? 이해해"
"동성애? 이해는 하지만 찬성하진 않는 편이야"
"야 이런 게 사랑이지. 그건 사랑도 아니야"
우린 얼마나 자주 들어 왔던가, 우린 얼마나 많이 지나쳐 왔던가. 지금까지 이 시대의 사랑의 형태는 내뱉어진 '말'로 오염되어, 얼마나 폭력적으로 규정되어 왔던가. 내부에서조차 미처 이해되지 못한 것들은 섣불리 말로써 내뱉어지고, 쉽게 규정이 되어, 끝내는 타인의 내부로 들어가 폭력을 행한다. 이 영화에서 두 주인공이 모두 '말'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설정은 이 고찰에 깊이를 더해준다. 그들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감정의 교류로써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채워나간다. '사랑한다'라는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숭고한 사랑이 탄생하는 과정이다.
물로 표현되는 괴생명체와 사랑을 한다는 영화의 설정을 보고 '말도 안 된다'는 불편한 심정이 들었다면, 어쩌면 이미 당신이 머릿 속에 '사랑'을 어떤 형태로 규정하고 있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영화는 물을 '최대한 낯선' 형태로 단순히 표현해냈을 뿐이다. 이 영화는 사랑의 형태를 어떤 것으로 절대 규정짓지 않은 '범사랑적' 태도를 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랑을 넘어 '나 이외의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로도 시선을 넓게 옮긴다.
영화에서 백인 남성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 분)가 가장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시선으로 대하는 인물은, 흑인이거나 장애인이거나 동성애자이거나 인간이 아닌 생명체다. 그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존재(대부분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존재)에 대해 '말'로써 하대하고 폭력을 행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렇게 억압받는 존재들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때론 '말'이 안 통해도 서로 소통하고 연대한다. 각자가 주체로서 욕망을 갖고 있다. 그렇게 이 영화는 '범사랑'을 넘어 '범우주'적 차원의 연대를 바라본다.
'나' 이외의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말'은 그저 부차적인 것에 그친다. 아니 어쩌면 '말'은 폭력의 또 다른 수단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있어서도 그렇다. 이 시대의 사랑은, 수많은 이들의 '말'로 쉽게 다친다. 그러나 '말'이 아니더라도, 서로가 있는 그대로의 서로의 존재를 채워주고 이해하는, 그것을 이 영화는 '사랑'이라 부른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이런 방식으로 미(美)와 추(醜)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영화가 말하는 물의 특성이란 결국, 사랑의 특성과 같다.
1) 어떤 형태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2) 어디에나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