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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상명 Jul 23. 2018

영화 <코코>, 그리고 죽음에 관한 이야기

<코코>, <원더풀 라이프>, <신과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

때는 생기가 더 어울릴 것 같던 연초였다

때는 연초, 새해의 첫머리였다. 지난 해의 연말, 어디서 밀려드는지 알 수 없던 불안으로 마치 혼자만 어둠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있는 듯한 시기를 빠듯이 버티어 냈던 나날. 그 끝머리에서 시작한 유시민 작가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그 즈음 완독했고 그때가 아마 이 새해의 첫머리였다. 생기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연초에 왜 앓는 소리냐는 힐난을 역시 나날이 회피하던 차에 유시민 작가는 가장 건조한 투로 말을 건네었다.

'어떻게 살 지'는 결국 '어떻게 죽을 지'와 맞닿아 있다고, 우리가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음을 늘 염두해야 비로소 지금의 삶이 더 가치를 갖는다고, 그러니까 난 23년 째 죽어가고 있다고. 그 건조한 문장들이 그땐 어떻게 그리 따뜻하게 다가왔던 지 모르겠다.


 그 무렵 <신과 함께>라는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마냥 재미없게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후세계와 모성이란 좋은 소재를 꼭 저렇게 '소비'해야 했나, 웹툰이 갖는 무게보다도 너무나 가볍지는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올 초 재개봉을 한 <원더풀 라이프>

그리고 당시 나의 새해 첫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츠의 <원더풀 라이프>(재개봉)였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 또한 죽음 그 이후 세계를 다루고 있던지라, 정말로 우연스럽게나의 연말과 연초는 마치 그 두 시기 사이에 끼어있는 내 모습처럼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경계에 관하여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한국과 닮아 있는 점이 많았던 <코코> 속 배경

그리고서 만난 작품이 바로 나의 2018년 개봉작 중 첫 작품인 <코코>였다. 역시나 이 영화도 사후세계를 다루고 있다. 1년 전, 그러니까 2017년 개봉작 중 내 첫 작품은 <너의 이름은.>이었는데 '죽음'과 '기억', '가족'을 다룬다는 점에서 많은 것이 겹쳐 보였다.


그러니까 <코코>는 어떤 작품이냐면, 망자(亡者)가 만들어낸 진혼곡, 산 자가 되살려낸 헌정곡 같은 게 아닌가.우린 보통 '생'과 '사'를 따로 분리해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시 내게 영향을 줬던 이 소중한 작품들이 전해준 사유에 따르면ㅡ그리고 이 영화에 따르면ㅡ'생'과 '사'는 마치 다리처럼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진혼곡이라면 보통 산 자가 망자를 위로하려 부르는 노래를 일컫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망자가 진혼곡을 만들어낸다. 내가 내 죽음을 위로하도록, 그래서 내가 나의 죽음이 오래도록 기억되도록 말이다. 결국 이 영화는 생과 사를 길게 연결된 다리 같은 영화다. 아이러니하게도 상영관은 생기 가득한 아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는 건 이상한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해선 안 될 것도 아니니까.

죽은 자를 기억하고자 하는 전통의례 '제사'라는 제도를 지내는 한국과, '망자의 날'을 기념하는 멕시코는 굉장히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내게 더욱 아이러니컬했다.


 디즈니와 픽사가 함께 지은 생과 사의 다리 위엔 가족과 사랑이 있다. 그리고 23년 째 죽어가는 나는, 죽는 거보다 산 사람들에게 기억될 지금이 두려워졌다.                     


'삶'도 '죽음'도 아닌 그 느낌이 너무 싫었다. 둘 사이에 낑겨져 있는 듯한 모호함이 괴로웠다. 기로에서 무엇이든 선택해야만 편안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죽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절박하게 살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저 살아지는 것이다. 


<원더풀 라이프>와 <코코>처럼 어쩌면 죽음이 싫었던 이유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잊혀지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반대로 삶이 싫었던 이유는 누군가에게 영원히 기억되기에 싫었을 수도 있다. <코코> 속에 구현된 생과 사의 다리. 어쩌면 나는 그 사이를 걷고 있었던 게 아닐까. '삶'에서 시작되어 '죽음'이란 종착지로 향하는 곳이 바로 지금의 현재가 아닐까. 이곳은 아마 '삶'과 '죽음'의 구분이 명확한 곳이 아니지 않을까.


살아가기에 죽어가고 있는 것이고, 죽어가고 있기에 결국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유시민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꺼린다. 마치 금기어처럼 숙연해지고 이내 회피한다. 늘 '삶'에 주목한다. 그러나 '삶'은 늘 '죽음'을 동반한다, 늘 '죽음'을 전제한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보인다. 나는 그곳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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