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그 이후, 일상 (180729)
"그런데 왜 거기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
"'죽음'이란 말이 두 번인가 있었던 것 같던데."
꽤 오랜만에 만난 엄마가 물었다.
내가 경주에서 쓴 글을 읽으신 모양이다.
두 번도 충분히 더 읽었을 것이다.
분명히 얼굴에서 걱정이 섞여있음을 보았지만, 의연하고 밝으려는 표정이 그를 가리었다.
잠시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할 대답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온 수많은 이유들이 머릿속을 우글거렸지만,
그 낮고 깊은 영역들에 관한 건 끄집어내선 안 되었다.
그래서 개중에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재빨리 만들어냈다.
"<경주>라는 영화에선 남자 주변에 '죽음'을 연상하는 사건들이 자꾸 따라다녀. 그 영화가 인상에 많이 박혔었나 봐."
무난하고 안전한 대답을 하고 머쓱하게 웃었다.
나는 그녀의 걱정을 최대한 덜어줌과 동시에, 아마도 그녀가 원하는 답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제야 명쾌하단 듯 안도의 표정이 피어났다.
어쩌면 그건 나의 안심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건 누구에게나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우린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 거라고. 난 23년째 죽은 거라고.
누구든 그걸 알아야 하고, 그에 유난을 떨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위선적인가.
이해의 영역과 마음의 영역은 다르다.
막상 희미하게 걱정을 품은 눈을 보고 말하자니 도리어 내 눈이 흔들렸고,
아마 다른 곳을 응시한 채 말했을 것이다.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나를 늘 걱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날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당신이 인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괜찮아요.
그래도 물어봐줘서 고맙습니다.
견딜 만하진 않아요.
나는 여전히 '경주는 죽은 도시같다'고 말한다.
내가 느낀 게 분명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 탓이 아니었다.
영화는 언제나 나의 변명이 되어준다.
그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