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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상명 Sep 25. 2018

나의 얘기

<토니 타키타니>를 빌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시간이 시간을 먹고, 하루가 또 하루를 먹어서, 그냥 이렇게 살다보면 세상과 조금은 어울릴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이전엔 없던 확신은 하나 생겼습니다.

나와 어울리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것의 분별을 머리가 아니라, 이 몸이 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장 말씀드릴 수 있는 결론은, 이렇게 바쁜 하루가 지속될수록 생각의 잠복이 길어진다는 슬픈 사실입니다.

_

푸르스름한 새벽의 한기가 가시기도 전 눈을 떴습니다.

나는 뭐가 그리 억울했는지 안쪽 볼에 통증을 느낄 정도로 잔뜩 힘을 주어 이를 물고 있었습니다.

찡그린 채로 새어나온 불빛이 아마 '5:03 am'을 비추고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좋지 못한 꿈을 서너개 즈음 지나온 듯 합니다.

마지막의 꿈은, (지금은 기억도 잘 안 나지만) 무언가 굉장히 억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애를 써서 기억을 해내면 할수록 잡히지 않고 안개처럼 옅게 번져가는 것 같습니다.

행복한 꿈은 기억에 남는 것조차 꺼리는 모양인데, 그래서 좋지 못한 꿈이라도 잠시 붙잡아두고 싶지만 이 마저도 쉽지가 않습니다.

_

"이제 자기 얘기도 좀 하고 그래요"

아마 그 날의 기억에 있는 거의 마지막 말이었을 겁니다.

그렇게도 선명했던 것이 이제는 어렴풋한 게 미련하고 억울하지만 저 말 한 조각은 파편이 되도 남겨둘 계획입니다. 참 좋은 말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아직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내 속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있는 걸 꺼내어 보기가 조금은 두렵습니다.

더군다나 이 따가운 것을 꺼내서 당신들에게 보여줬을 때, 그와 내가 감당해야 할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가 싫습니다. 그것도 그 타인이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면 더욱 꺼려집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청자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타인의 어둠은 잘도 먹어버리면서 정작 내 방에 어둠이 조금씩 사라지는 건 그리도 아까웠나 봅니다.

_

이기적인 태도였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외지에서 만난 이름 모를 사람과 술을 먹고 밤새 울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도 모를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그때가 아마 나의 첫 '자기 얘기'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역시나 기억은 흐릿하지만, 내 입에서 나와 내 귀로 가장 많이 들어온 말은 "어차피 내일이면 아무렇지 않게 다시 안 볼 사람이지만"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날 실컷 '나의 얘기'를 했습니다.

어둠이 진회색이 될 때까지 정말 다 내뱉고 나니 비가 세차게 내렸고 그 이름 모를 사람도 울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건 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기억은 딱 거기까지입니다.

_

<토니 타키타니>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한 글쟁이의 말을 조금 빌어 말하자면,

그는 '고독'이란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기에 '고독이 밀려온다'는 말은 틀린 것이고, 가끔 밀려오는 것은 고독하지 않다는 착각의 시간들이라 적습니다.

더불어 그는 '행복'이란 것에도 사유의 선물을 챙겨줍니다.

심보선 선생님의 <매혹>이라는 멋진 시를 두고,

'이런 구절들이 진정으로 행복의 빛깔을 띠게 되는 것은 “나는 어렴풋이 기억한다”와 “나는 이제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와 같은 문장들이 있어서가 아닌지.'라는 글을 적어주셨습니다.

행복은 결국 고독 이후 기억함으로써 발생하는 거니까, 결국 행복은 불행과 맞닿아 있구나.

그제야 얽힌 생각이 조금은 풀렸습니다.

영화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는 머리카락 한 가닥 정도의 틈새 밖에 없어'라는 대사도 비슷한 의미일까요?

토니 타키타니는 에이코로 인해 '다시 외로워지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 두려움이 바로 행복과 들러붙어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_

사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리 말해줄 입장은 못됩니다.

먼지처럼 들러붙은 기억을 먹고 사는 우울이 가끔 내게 말을 겁니다,

그러게 넌 처음부터 혼자인 게 나았을 거라고.

이런 말을 듣고서 다시 나는 청자에 머물고 있습니다.


언제쯤 나는 나의 무게를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기댈 수 있을까요?

어쩌면 나는 슬픈 눈을 가진 청자로 남아야만 비로소 고독을 면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날 새벽 비가 세차게 내리는 그곳에서, 나의 청자가 되어준 누군가에게 지금도 부끄런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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