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치>의 영리한 연출
'스노든 게이트'에서 스노든의 폭로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필자는 영화 <스노든>을 본 뒤, 그런 감상을 남긴 적이 있다.
'정보의 판옵티콘에 갇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21세기 빅브라더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일이다.'
미국의 '스노든 게이트' 사건뿐 아니라, 프랑스의 '샤를리 엡도', 가깝게는 '카카오톡 사찰' 사건만 보아도 이 시대의 정보사회에서 누군가 누구를 사찰하고 감시한다는 건 그저 공상이 아니다.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게 바로 벤담이 제안한 원형감옥 '판옵티콘 :Pan(모두를)+Opticon(보다)'이다. 어느샌가 '감시'당하는 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자신의 자발적인 정보 노출까지도 행하는 모습. '빅 브라더'처럼 언제 어디서든 우릴 지켜보고 있는 CCTV는 물론, 노트북에 달린 웹캠, 빅 데이터를 이용한 자동 큐레이션 서비스, SNS 공간에서의 위치 및 개인정보 등은 편의를 내세워 섬뜩함을 감추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선 일찌감치 데이터 베이스에 의한 감시는 언급되었다.)
비슷한 지점에서 영화 <서치>는 섬뜩하며 동시에 영리하다. 딸의 실종부터 사건의 종결까지 영화는 시종일관 온라인과 영상기기 화면으로만 구성된다. 컴퓨터 OS 운영체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페이스타임, 구글, 인터넷 방송, CCTV, 뉴스 속 화면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의 전부다. 서스펜스가 중요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에선 과감한 시도이자 연출이 영리하지 못하다면 실패의 여지가 큰 도전이다. 하지만 아나쉬 차간티 감독은 데뷔작으로 이 작품을 영리하게 세상에 내놓았다.
영화라는 매체는 사실 최근의 수많은 스마트 디바이스와 그 운영체제와는 친하지 않다. 장르적으로 표방하지 않는 이상 영화 속에서 스마트폰과 SNS의 소거는 불문율 같은 것이다. 영화 속에서 제약을 만들어 냈을 때, 이 제약의 대다수를 스마트폰이 해결해버리는 시대다. 관객들에게도 아직 영화 속의 스마트화(?)는 조금 낯설다. 사랑 영화가 절절한 이유는 언제는 만나고 연락할 수 없는 제약이지, 언제 어디서든 얼굴을 볼 수 있고 페이스북을 접속하고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있는 편리성이 아니다. 비슷하게 범죄영화가 긴장감을 유발할 수 있는 이유는 위치추적과 CCTV 능력의 소거와도 맞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모든 온라인성을 소거의 방식이 아니라, 전면에 내세워 영화의 100%로 구성한 연출은 영화적으로도 흥미로운 실험이다.
병으로 아내를 잃고, 딸과 살아가는 아버지 데이빗 킴(존 조 분)은 영화 <테이큰>의 리암 니슨을 떠올리게 한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곤 리암 니슨의 물리적인 힘이 존 조의 미디어 활용 능력으로 치환한 점이 아닐까. 딸과의 연락이 3일째 닿지 않자 실종 신고를 하고, 형사의 사건 추적과는 별개로 데이빗 킴은 딸의 노트북을 이용해 지금까지 딸의 온라인 속 활동을 추적한다. 다행히도(?) 딸의 온라인 활동이 활발해서 아버지는 뒤를 밟고 또 밟는다.
영화에서 가장 영리하다고 생각되는 연출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로는 동생 피터(조셉 리 분)를 의심하는 장면이다. 딸과 자신의 동생 피터와의 의심스런 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뒤, 데이빗은 피터의 집에 찾아가 초소형 카메라를 곳곳에 설치한다. 그리곤 그 영상이 백업될 파일 이름을 '증거'라 적는다. 그때부터 영화는 이 몰래카메라 4개의 분할화면 시점으로 이끌어진다. 그렇게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인위적인 카메라를 들이밀어야 하는 장면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제약을 활용한다.
두 번째는 유튜브의 활용이다. 전 세계적으로 미디어 플랫폼의 절대적인 매체는 역시 유튜브다. 영화는 온라인 상으로 의심하는 인물을 직접 대면하는 장면에서도 미디어를 영리하게 활용한다. 데이빗이 딸과 '친구' 맺어있는 한 의심스런 인물의 게시물을 보고 위치정보를 추적해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고프로를 들 수도 없는 노릇,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타인의 시선으로 이를 연출한다. 딸을 잃고 폭력을 행사한 아버지라는 프레임으로 제 3자의 시선으로 유튜브 영상이 영화로 활용되는 거다.
이 영화는 맥거핀이다. 어쨌든 미스터리나 스릴러, 범죄 영화에서 관객들이 가장 집중하는 부분은 '과연 누가 범인인가'라는 점이다. 결국 이런 장르에서 좋은 연출이란 관객을 시도 때도 없이 속여야 하며 그들의 예상 범주를 벗어나야 한다. 제약된 상태로 시작한 이 영화는 영리하게 제약을 활용한다.
최근 한국에선 <목격자>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다른 소재지만, 관객에게 '방관의 효과'를 유발한다는 점이 유사하다. <서치>에서 네티즌 댓글로 잠깐 언급된 <나를 찾아줘>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벌어진 '사건'을 어느샌가 관객인 우리가 '방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럼 영환에서 관객이 할 수 있는 게 방관 말고 무엇이 있냐'라는 반박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방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데에는 현실에서의 우리가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을 우리는 수많은 가십 중 하나로 소비할 때가 많다. 방송사와 언론사는 앞다투어 자극적인 소재를 보도하는 데에 기를 쓰고, 우린 네모난 화면 속에 쏟아지는 것들을 마치 팝콘 들고 영화를 방관하는 관객처럼 바라본다.
영화 <서치>가 고하는 점도 그 비슷한 지점일 것이다. 영화는 과장을 보태면 <스노든>에서 시작해 <나를 찾아줘>로 끝낸다. <스노든>이 정보의 판옵티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당신은 지금도 감시당하고 있다'라고 고했다면, <나를 찾아줘>는 '당신도 이토록 방관하고 있지 않냐'며 되묻는다.
그리고 <서치>의 부지런한 연출은 끝내 우릴 방관자로 만드는 데에 성공한다.
영화 <서치>는 누구나 범인이나 피해자로 지목될 수 있는 사이버 판옵티콘의 현실을 고한다. 이 영화의 성취는 첫째는 연출이며, 둘째는 이 소재에 있다. 결국은 미디어다. SNS 세대는 물론, SNS 세대가 아닌 이들까지 섬뜩한 공포를 심어줄 수 있다. 구글은 어떠한가. 우리를 끊임없이 추적하고 우리의 정보를 보유하려 한다. 영화의 감독, 아나쉬 차간티가 구글 크리에이티브 랩에 스카우트되었던 걸 생각하면 또한 흥미롭다.
18세기 벤담의 원형감옥은 아직도 유효하다.
21세기의 판옵티콘은 지금도 당신에게 눈을 굴리고 있다.
그리고 당신은 수감 중인 줄도 모른 채 정체 모를 감시자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