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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상명 Jul 24. 2018

지워도 지워도 모두 지워낼 수 없는 '나다움'이란 자국

<밤의 해변에서 혼자>

홍상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쓸쓸하고, 또 가장 어두컴컴하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의 해원(정은채 분)도 참 쓸쓸한 인물이었고, <북촌방향>은 그야말로 어두컴컴했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의 쓸쓸함과 드리워진 어둠은, 역설적으로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어둔 빛이 나 유심히 눈여겨볼 만한 감정들의 초상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어둠을 짙게 깔고 간다. 가령 홍상수 영화에선 빠질 수 없던 원색 위 성의 없는 듯 쓰여진 홍상수의 손글씨 대신, 검은색 바탕에 기본 서체로 제목이 차갑게 쓰여 있다.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영상의 색조도 어둡고, 인물들의 얼굴에도 마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듯하다. 김민희가 입고 나오는 코트나, 2부에 등장하는 의문스런 정체의 남자도 전부 검은색이다.

영화는 제목에서도 보여주다시피, 어떠한 쓸쓸함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 주체가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삶'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일부 관객이 생각하는 '그들의 사사로운 관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답은 오직 관객이 느끼는 몫이다. 왜냐면 홍상수 영화는 늘 그래왔으니까. 그리고 영화라는 예술 원래 그런 거니까.

베를린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김민희의 '영희'는 실로 어마무시하다. 영희를 평가하는 주변의 말처럼 수많은 고통을 감내한 듯 성숙해 보이기도 하며, 때론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도 보이고, 말을 아끼며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이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적극적으로 자기 생각을 표출하기도 한다. 김민희를 얼굴 속에 무수한 감정과 생각을 숨기고 있는 듯한 배우라 표현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선 속내에 있던 이 모든 감정과 생각을 모두 터뜨려 버리는 듯하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ㅡ원하든 원치않든ㅡ어느새 그녀에게 빠져 들고, 이를 자각한 순간 서늘한 공허함과 더불어 무시무시함까지 느껴진다.


홍상수 영화의 가장 탁월한 점 중 하나는 '포착'이라 생각한다. 가장 놀라운 포착은 예고편에서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듯, 영희가 담배를 피우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일 것이다. 그저 홀로 담배를 피우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인데, 관객에게 이 장면은 의도된 연출보단 포착으로 느껴진다. 영화의 끝으로 갈수록 영희의 쓸쓸함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이 장면과 이 멜로디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이 음악은 영화 촬영 당일에 홍상수가 미니 피아노로 작곡, 작사한 곡이라는 것이다.) 그 이외에 사실 김민희의 모든 연기와 대사가 거의 정해져 있거나 약속된 대본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나 1부에선 배우끼리 대사가 물리는 장면도 2차례 정도 찾아볼 수 있었고, 김민희의 연기를 보면 온전히 김민희 자신에게서 나온 즉흥적인 연기라 느껴지는 장면도 많다. 영희에게서 김민희가 투영된 건지, 김민희가 영희에게 투영된 건지 조차 알 수 없다. 그저 김민희에게서 영희가 튀어나오고 영희에게서 김민희가 겹친다.

술자리에서 준희(송선미 분)에게 매력적이란 소리를 듣고, 취기 어린 얼굴로 머리를 넘기고 어리광을 부리는 순간의 포착은 '왜  영화계는 이토록 김민희란 배우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필자 또한 넋 놓고 본 장면이다.)


지워도 지워도 모두 지워낼 수 없는 '나다움'이라는 자국


사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예술과 아티스트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더구나 아티스트에 대한 인식이 예술보다 먼저 박혀 버렸을 때 이를 예술에서 떼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관점에서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 배우의 스캔들이 터진 직후 나온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그 둘 사이의 상황과 관계에 대해 역시 물리적으로 떼어 내서 보긴 굉장히 어렵다. 더군다나 이 영화는 그 둘의 상황과 절묘하게 일치하는 부분 또한 상당하고, 시놉시스는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많은 대중들은 이 영화를 보기도 전에 "더러운 자전적인 얘기엔 관심 없다."며 비난한다. 사회가 규정한 '도덕성'이라는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 아티스트에 대해 일종의 '보이콧' 같은 반응이다.


 박평식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고백이자 반성, 변명이자 호소"

필자 생각에도 이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자아분열이자, 자기파괴, 혹은 자의식이 어느 정도 반영된ㅡ반영될 수 밖에 없는ㅡ 영화라고 생각한다. 10년이 넘도록 늘 홍상수 영화는 홍상수 본인이 겪는 감정, 상황, 관계, 기억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영화에서도 주변 인물들의 대화 중 "사람들은 남 일에 참 관심이 많아" "다들 할 일이 없어서 그래"라든가, "지들은 그렇게 잔인한 짓 하면서 지들끼리 좋아하는 걸 불륜이래" 같은 뉘앙스의 대사들은 오히려 그 둘의 상황이 겹쳐 보일 수밖에 없는 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의도적이지 않았나 싶을 정도의 노골적인 대사였기 때문이다. 특히 꽤나 힘이 실린 장면이라서 더더욱 그렇다. 영희가 다리를 건너다 말고, 뜬금없이 절하는 장면에서도 이미 관객들은 끊임없이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 박평식 평론가 말마따나 일종의 반성의 자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민희가 모래사장에 그린 남자의 그림도 자세히 보면 당시 머리를 짧게 깎은 홍상수와 닮아 있다. 또한 영희에게서 김민희의 현재 심정과 상태가 겹쳐 보이기도 하고, 영화감독으로 나오는 상원(문성근 분)과 선배로 나오는 명수(정재영 분)를 보면, 상원은 김민희를 만난 이후의 홍상수의 상태, 명수는 김민희를 만나기 이전 결혼 생활을 하는 홍상수의 상황처럼 보인다. 둘의 상황에 빗대어 생각해서,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냐면 상원의 '상'과 명수의 '수'를 따면 '상수'라는 다소 무리스러운 추측까지도 힘이 실릴 수 있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듯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영화는 정답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답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예술가의 품에서 벗어난 예술은 더이상 예술가만의 것이 될 수 없다. 즉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해석과 자세는 오롯이 관객의 몫이며, 실제로 영화는 오직 홍상수와 김민희의 상황만을 대변하고 있진 않다(고 생각한다.)

영희는 언제나 '나다움'을 강조하며, 솔직함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술김에 주변 사람들에게 "전부 다 가짜"라며 핀잔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영희는 이 '나다움'과 '솔직함' 때문에 겪는 쓸쓸함과 파멸의 상황에 놓여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불륜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나답기를 바랬던 영희는 그 고통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며 묵묵히 살아가려 하지만, 결국 2부에선 그 참을 수 없는 솔직함이 계속해서 분출되고 만다. 2번의 술자리에서 그녀는 가장 솔직하다. 가장 '영희답다'. 그로 인해 다가 오는 모든 것들은 오롯이 영희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지만, 알면서도 그녀는 솔직하게 호소한다. 물론 누군가에겐 이 호소가 변명처럼 들릴 순 있겠다. 그러나 그게 온전히 '영희'라는 인물의 본질(나다움)이며 이를 타인인들 어찌할 수 없다. 영희는 사랑에 뜨겁게 데이고 차갑게 쓸쓸해진 이후, 지우고 지워도 모두 지워낼 수 없는 '나다움'이라는 자국을 어쩌면 평생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사랑이란 굴레에서 벗어나 뜨겁게 아파해 본 지인과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그 지인은 불륜과는 관계가 없다.) 그이는 영희의 감정과, 이 영화가 드러내는 감정에 대해 누구보다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었다.


"괴물이 되는 거 같아. 계속 후회해. 매일 같이 지긋지긋하게 후회해”
“자꾸 하다 보면 달콤해져 그래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계속 후회하면서 죽고 싶어.” 

특히이 대사에선 심금이 아릴 정도로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고 했다. 술이라는 것이 먹을 땐 쓰더라도 먹다 보면 어느새 그 고통이 무뎌져 달콤해지는 것처럼, 사랑도, 삶이라는 것도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다 보면 어느새 달콤해진다. 그리곤 결국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영희가 바다를 계속 찾아가는 것도, 또 말없이 그 아득함을 응시하는 것도 영희가 바다를 보면 어느 순간 그냥 바다 속에 뛰쳐 들어 죽어버리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어쩌면 죽음의 의미에서 보다 확장되어 <버닝>에서 해미(전종서 분)가 노을을 보며 사라져 버리고 싶은 욕망일 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선 가장 미스테리한 인물이 등장한다. 영화는 끝내 이를 설명하지 않는다.

'죽음'이란 상징성과 상통하는 존재를 바로 이 검은 옷의 남자라 비유할 수 있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찾아왔지만 피하려 해도 끊임없이 곁을 따라 다니고, 남들에게 보이진 않지만 자신의 내면엔 항상 존재하는 응어리 같은 존재. 사랑에 깊게 파인 상처가 있거나, 삶에 고통받는 사람들은 흔히 "죽은 거나 다름없이 살아간다"라고 얘기한다. 1부가 끝나고 영희를 데려가는 검은 옷의 남자를 보면, 어쩌면 영희는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희의 상황이나, 홍상수-김민희 관계로 초점을 맞춰 본다면 그 남자를 '대중'이나 그들을 둘러싼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떼어내고 싶어도 어느 순간 찾아와 지켜보고 있고, 늘 곁에 따라다니는 이 존재를 보면 왠지 모를 죄책감이나 스트레스를 상징하는 존재로도 생각할 수 있다.                                                     

               

영화가 줄 수 있는 메시지는 이토록 자유분방하고 방대하다. 각자마다 받아 들이는 자세나 느낌 또한 다르다. 필자는 예술과 소통하는 모두의 자세와 느낌을 존중한다.

그리고 홍상수 영화는 늘 솔직했다. 때론 얄미울 정도로 솔직했고, 때론 내 자신의 가장 부끄럽고 숨기고 싶던 속내를 거울로 비춰 드러내는 것 같았다. 타인의 사생활에 그리 큰 관심이 없는 나로서, 그의 사생활에도 크게 관심은 없지만 분명한 건 그는 영화에 있어서는 거짓이 없었다. 지워도 지워도 모두 지워낼 수 없는 '나다움'이란 자국처럼, 영희가 비로소 떨쳐내지 못했던 그 얼룩처럼, 홍상수도 완벽히 지워낼 수 없을 것들을 지워낼 바에 차라리 '나다움'을 택한 거 같아 보인다.

예술과 도덕성 간의 관계는 오래도록 의견이 대치해왔다. 나는 누군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할 입장도 안 되며 그마저도 이해할 순 없지만, 예술가에게 어떤 프레임이 씌워지고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예술가로서 큰 저주이자 결함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그의 예술을 지켜봐 왔던 필자로선 나의 시선에도 자칫 프레임이 씌워질까봐 예술가 '홍상수'에 대한 우려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를 비판하는 이들의 시선도 존중한다. 예술을 받아들이는 누군가의 시선을 또 다른 누군가가 절대 뭐랄 순 없다. 단지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든 채, 죽은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에겐 이 영화가 또한 새로운 시선이자 위로로 받아들여질 것이란 생각엔 변함이 없다. 예술을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난 이 영화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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