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따뜻한 색, 블루>
가장 따뜻했던 당신이라는 색(色)으로 물든 선홍빛 소녀의 세상
살짝 벌리고 있는 입, 선홍빛을 띠고 있는 두 볼, 대충 올려 묶은 머리를 가진 그 소녀의 세상이 궁금하다. 소녀는 문학을 좋아하고, 상상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며, 식욕이 엄청나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소녀는 어엿한 숙녀라는 표현보단 아직 순수한 어린아이란 표현이 더 와닿는다.
프랑스 문학 '마리안의 일생(La Vie de Marianne)'으로 시작되는 초반부에서 낭독되는 구절은 바로, '운명적 사랑, 이끌림'에 관한 내용이다. 대목을 읽던 학생들에게 교사는 묻는다.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뚫린다는 게 뭘까?"
아델(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 분)은 이 구절에 대해 아직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소녀는 왠지 모르게 이 책에 끌리고 있다.
그런 소녀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이 불쑥 찾아든다. 여느 또래 친구들처럼 남자도 만나고 남들처럼 관계를 이어봤지만 이상하게도 채워지지 않는 감정이었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참 이상한 무언가가 소녀의 심장을 쿡쿡 찌르며 간지럽힌다. 인간이란 본인에게 낯선 감정엔 두려움이 먼저 앞서지 않나. 소녀는 혼란스럽다. 사랑이 뭔지,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도 하나도 모른 채 광활한 바다에서 표류하는 길 잃은 깃발과도 같다. 소녀는 솔직하다. "내가 가짜 같다", "이상한 애다"와 같은 소녀의 대사에서도 이 혼란스런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그렇게 불쑥, 그리고 자연스레 스민 블루는 어느새 소녀의 마음 한 켠에 들어온 것이다. 소녀의 흔들리는 이 감정을 붙들어 준 건 바로 파란색 머리를 하고 소녀의 마음을 강렬히 사로잡은 엠마(레아 세이두 분)이다.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것에 대해 익숙한 엠마는 소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간다. 본인이 가짜 같다고 말하는 아델의 초상을 그려주기도 하고, "사랑엔 성별이 없지", "행복하면 다인 거야"라며 소녀를 붙들어 준다. 그리고 그 둘은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 조심스레 입을 맞춘다.
소녀의 세상이 이제 여지없이 푸른 빛을 뿜어낸다. 어떤 사랑은 너무도 절절해서, 어떤 특별 색으로 발현이 되곤 한다. 사랑이 늘 분홍빛일 필요는 없다. 선홍빛 두 볼을 가진 소녀에게 찾아온 건 '분홍빛 사랑'이 아니라 그보다 더 따뜻한 '푸른빛 사랑'이다. 영화에선 이에 관한 미장센을 과감하게 보여준다. 가령 파란색 목도리나, 옷, 주변 모든 사물에도 이 진한 파란색이 늘 공존한다. 소녀의 세상은 이제 온통 사랑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빛과 색은 바래지기 마련이다, 여느 사랑이 그렇듯. 가장 따뜻하고 뜨겁던 사랑이 천천히 식어간다. 현실을 견뎌내다 보니 어느새 둘은 자연스레 바래졌다. 따뜻하며 강렬했던 엠마의 파란 머리색도 어느새 물이 빠져 그 파란빛을 잃어버린 듯이 말이다.
사랑의 고통은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싹을 틔운다. 소녀는 사랑을 알아가며 점차 성장해 나갔다. 마냥 어린아이 같았던 소녀는, 이제 어엿한 어른이 되어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어린 내면은 끝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라며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소녀의 얼굴에서는 순수와솔직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 뻔하고도 유치한 대사가 그토록 절절하고 슬프게 다가온다.
사랑이란 관계의 지속성은 끝을 맺어도 아델에게 물든 파란색은 쉽게 빠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아델은 점점 파랗게 잠식되어 간다. 이별을 쉽사리 껴안지 못한 그녀는 그 푸른 바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가장 따뜻하던 색 블루가, 가장 차가운 색이 되어 버린 순간이 그토록 우울하다. 이때 만큼은 파란색의 의미가 '우울'과 '쓸쓸'에 가깝다.
이 잠식의 순간은 오히려 그녀를 단단하고 성숙하게 만들었다. 이젠 어떤 감정도 솔직하던 소녀의 모습에서는 견디고 놓아줄 수 있는 어른의 모습이 엿보인다. 놓아주는 그 순간의 장면은 이 영화의 그 어떤 장면보다도 애처롭고 쓸쓸하며 가슴을 절절히 울린다.
이제 엠마에게선 '블루'를 찾아볼 순 없어 보인다. 훗날의 파란 원피스를 입고 찾아간 엠마의 전시회에서 파란 것은 오직 그림 속 엠마가 아델에게 그은 푸른 획과, 그럼에도 여전히 푸른 엠마의 눈동자 뿐이다. 이제 그대 안의 블루는 없지만, 눈동자만이 여전히 푸르다. 전시회를 둘러 본 아델의 표정은 복잡한 듯 초연해 보인다. 그 아픔을 감내하고 버티는 삶을 살았던 그녀에게 어쩐지 정감이 든다. 전시회를 빠져나온 아델의 뒷모습은 이제 더 이상 여린 소녀가 아니다. 이제 다시 홀로 비탄한 인생 길을 걸어갈 성숙한 여인의 발걸음이었다.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갈 때 즈음이면 많은 관객들이 그녀의 삶에 고요한 응원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당신에게 그토록 따뜻했던 색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 듯 하다. 우리가 살면서 이토록 헤어나오기 어려운 가슴 저린 사랑을 경험하긴 쉽지 않다. 그것을 축복이라 부르지는 않겠다. 그 사랑에서 헤어나오는 과정에선 가장 불행한 순간을 경험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그런 사랑을 해보지 못한 이들이 느끼지 못할 가장 행복의 순간 또한 경험했다는 점은 훗날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내게 가장 큰 아픔을 준 상대가 내게 가장 큰 행복을 준 상대일 때, ㅡ이승우 작가의 '사랑의 생애' 표현을 빌어ㅡ 사랑이라는 숙주가 내 몸에 들어와 살다가 비로소 완전히 빠져나갈 때. 우린 그걸 사랑의 생로병사라 부른다.
영화에서 두 사람을 다루는 시선이나,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꽤나 섬세하고 사려 깊다. 3시간의 장정(長程)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누군가의 삶에 위치한 사랑의 모든 순간을 함께 경험한 듯 하다. 즉 영화는 우리 모두의 평범한 삶 속 특별한 사랑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오히려 '동성애'라는 수식어를 떼어 내고 영화를 감상한다면 누구나 겪어봄 직한 애틋하고 애절한 이야기이다.
사랑을 온도로 표현한다면 가장 따뜻하고 뜨거운 순간부터 가장 차가운 순간까지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든 사랑은 따뜻하고도 차갑다. 어쩌면 아델은 평생을 블루 안에 살지도 모른다. 물든 색이 쉽게 빠지지도 않으며, 그 얼룩 혹은 잔상만은 영원하듯 말이다. 앞으로 다시 살아갈 아델에게 난 애틋함을 느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마리안의 일생'이라는 책으로 수업하던 교사의 질문을 떠올려 본다.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뚫린다는 게 뭘까?"
이제 더이상 소녀가 아닌 아델은, 그 물음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