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타 이즈 본>이 보여주는 예술과 사랑 사이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광복을 이루기도 전, 미국의 할리우드라는 공장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거대 스튜디오 시스템 속 스타 배우를 앞세워 할리우드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영화를 찍어냈다. '스타'가 된 배우는 철저히 시스템 속에서 스튜디오와 관객의 예상된 기대치만 적절히 채워주면 됐고, 결국 4-50년대 무렵 전성기를 맞이한 할리우드는 영화계에서 그야말로 파죽지세를 달렸다. 그렇다면 그 당시 그 시스템 속에서 철저히 기대만큼, 계획대로 움직이던 '스타'로 불리던 이들은 어떻게 '스타'가 되었나.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술과 고뇌하고 '스타'라는 이틀의 쟁취를 위해 질투하고 경쟁하던 모습은 과연 지금과 다를 바가 있을까.
한국 관객들에겐 <스타 탄생>이란 제목으로 더 익숙할 영화 <A Star is Born>(원제) 약 80년에 걸쳐 3번의 리메이크가 됐다. 그러니까 이번에 개봉한 영화가 무려 4번째 영화인 셈이다. 원작에서 무려 80년이란 세월이 지난 이야기지만 2018년 리메이크작까지, 모든 리메이크 작품들은 원작의 큰 이야기 뼈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큰 차이가 있다면 37년과 54년은 할리우드 배우 '스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77년작과 18년작은 가수 '스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예술가의 탄생과 질투와 사랑, 고뇌와 좌절, 큰 뼈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본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메가폰을 잡고, 여자 주인공엔 비욘세가 캐스팅 물망에 올랐다는 소문이 나돌 때까지만 해도 순조로워 보이던 이 프로젝트가 여러 내외부의 문제로 붕 떠버렸지만, 브래들리 쿠퍼가 배짱 있게 연출과 주연을 모두 도맡으면서 영화로 완성될 수 있었다. 연출자이자 주연까지 도맡아 제작되는 영화들이 대개 실수하는 부분은 연출에 힘이 가득하거나 과욕으로 영화의 초점이 흐려지는 점이라 생각하는데, 브래들리 쿠퍼의 연출자로서 능력은 기대보다 뛰어났다. 무엇보다 감탄한 건 Original Sound Track을 확인하고 나서였다. 음반 작업의 수많은 부분에 참여한 것은 물론 관객이 인지하지 못한 채 흘러갈 수 있는 음악까지 완성도가 뛰어났다. 과연 이 연출자가, 이 배우가 이 음악영화에서 얼마나 음악을 세심히 다루는지, 그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음악가로서의 레이디 가가는 단연 말할 것이 없다. 영화에서 레이디 가가가 보컬로 참여한 모든 곡의 작사 작곡을 주도했으며, 그녀의 제안으로 영화 속 모든 공연 씬은 라이브로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 두 예술가가 만든 가장 큰 시너지는 역시 'Shallow'라는 곡에서 폭발한다. 예고편에서부터 한껏 기대를 모았던 이 장면이 과연 영화에서 어떻게 표현될지가 큰 관람 포인트 중 하나였는데, 그 장면을 위해 쌓아 올린 두 사람의 감정선이 굉장히 견고했기에 그 장면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 영화의 가장 마음을 뒤흔든 명장면이었다.
이 장면이 필자 입장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장면을 보며 특히 울컥했던 이유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들의 순간이 아마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이들의 가장 행복한 시절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개 영화가 그러하듯, 인물에게 행복의 극치를 부여하면 남은 시간 동안엔 더 이상 그보다 큰 행복을 부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한 스타의 탄생'에 관해 보여주는 영화라면 당연히 '스타'라는 명성에 걸맞은 시련과 좌절을 겪게 만들어야 '영화'라는 예술의 퍼즐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예술이 그래서 매력적이다. 관객은 알고 있다. 이 두 사람은 이 행복한 순간 이후 서서히 불행해질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Shallow' 씬이 더욱 소중하고 아련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음악의 치유의 기능을 잊고 지낸 것 같다. 워낙 기술적으로, 기교적으로 뛰어난 음악들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치유의 기능보단 쾌락의 기능을 소비해왔다. 그러나 잘 제련된 이 영화의 음악을 듣고선 다시금 깨달았다. 음악이란 예술의 본연의 기능은 치유가 아닌가. 김학선 음악평론가의 표현을 빌려, 이른바 '흙내 나는 음악'이 지금의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감정이란 무엇인가. 내가 잠시나마 간과하던 음악의 본질이 무엇이었나.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른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영화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잭슨(브래들리 쿠퍼 분)의 대사에 노골적으로 담겨있다. 결국 음악(예술)이란 하고 싶은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대사는 모든 예술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잭슨의 그런 조언과는 달리, 앨리(레이디 가가 분)는 조금 다른 방식을 선택한다. 주관을 조금 섞어 얘기해보자면, 예술가의 길보단 스타로서의 길을 더 우선시하는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모습을 보고 실망해버리는 잭슨의 모습은, <비긴 어게인>에서 데이브(애덤 리바인 분)가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 분)에게 'A higher place'를 들려줬을 때 그레타의 반응, <라라 랜드>에서 재즈가 아닌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공연을 하던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분)을 바라보던 미아(엠마 스톤 분)의 반응, <본 투비 블루>에서 쳇 베이커(에단 호크 분)가 마약을 끊지 못하고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를 부를 때 결국 뛰쳐나간 제인(카르멘 에조고 분)의 반응이 겹쳐 보인다.ㅡ사실 이 영화가 그 영화들을 답습했다기 보단 이미 십수 년 전 만들어진 고전 <스타 탄생>의 답습일 것이다.ㅡ 예술적 영감과 가치관이 맞닿아 있는 두 사람이 사랑을 함으로써 발생하는 화학적 반응 이상의 예술적 시너지는 엄청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샌가 그 예술적 영감과 가치관의 궤적이 틀어져 균열이 발생하는 순간 뮤즈라 생각했던 서로에게 더 큰 기대의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그래서 예술과 사랑이라는 것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수많은 예술의 분야에서도 진부하달 수 있는 '사랑'이라는 소재가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이유는, 사랑의 탄생과 죽음 이후까지의 과정이 돌림노래이기 때문이 아니라 변주로써 다가오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는 예술가와 스타 사이의 경계에서 발생한 균열을 이야기한다. 스타가 예술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이야기'를 '자기 방식'대로 하는 예술가와, 그에 대중들의 기호를 첨가하는 스타와는 성질에 차이가 있다. 잭슨의 길은 전자에 가까워 보이고, 앨리의 길은 후자에 가까워 보인다. 매너리즘에 빠진 예술가, 그가 바라보는 스타가 된 연인. 예술적 영감을 주던 사이에서 스타가 된 그녀의 앞길을 막는다는 생각이 균열을 만들었고, 영화는 그렇게 그들의 행복한 시절을 종결해버린다.
'사랑의 죽음 이후'도 예술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떤 예술적 영감도 더 이상 줄 수 없는 잭슨은 죽음으로써 그녀에게 자신이 들려줄 수 있는 마지막 이야기를 준다. (I'll never love again). 그녀는 그가 준 마지막 단어들과 선율을, 그녀의 목청으로 절절하게 뱉어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뱉어낸다. 마치 죽음과 이별을 미리 오래전부터 계획이라도 한 듯 말이다.
그렇게 그녀는 그의 마지막 이야기를 뱉어냄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스타로 탄생하는 것이다.(A Star is B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