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몽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상명 Feb 02. 2022

끝내 행복해질 것임을 굳게 믿사옵니다, 사랑

영화 <박쥐>, 너무나도 사랑에 관하여

* 영화 <박쥐>(Thirst, 2009)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뉴스를 보다 어느 날 문득 ‘재벌 3세’에 관해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갈고닦아 놓은 길을 반듯하게, 그리고 더 나은 걸음걸이로 걸어야 하는 남자. 그 남자에 관한 단편을 끄적이고선 아무도 보지 못하게 폴더 깊숙이 숨겨놨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이건령. 조부가 직접 지어주신 이름, 하늘 건乾에 거느릴 령領. 그렇게 탄생한 건령의 마음과 머릿속을 헤집어봤습니다. 궁금했습니다. ‘다 가져서 남 부러울 거 없는’ 그 삶엔 무엇이 있을지.


이카로스의 추락 La Chute d'Icare,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가장 먼저 그의 욕망과 쾌락을 파헤쳤습니다. 하늘도 거느릴 것 같은 저 높은 곳에선 과연 어떤 욕망과 쾌락이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건령은 조부의 작고作故 이후 방을 정리하다 우연히 벽에 걸린 그림을 봅니다. 마르크 샤갈의 이카로스의 추락. 찌를 듯한 태양 아래 덤덤한 눈으로 찬란히 떨어지는 이카로스. 건령은 그 추락에 마음을 붙잡혔습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밀랍 날개를 달고 “너무 높이도, 낮게도 날지 말라”는 조언을 무시한 채 태양을 향하다 날개가 녹아 바다에 추락하며 생을 마감한 이카로스. 건령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카로스는 어쩌면 태양이 아니라 추락을 동경했던 게 아닐까?’


프랑수아즈 사강 Françoise Sagan

프랑수아즈 사강이 마약 혐의로 기소됐을 때 그렇게 변론했지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의 추락이라는 전락에 대해 저는 오래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누구도 오르지 못할 정점에서 떨어지는 것이 궁극의 쾌락이 아닐까. 높은 곳에 오르고자 하는 본능은 전락을 위한 욕망이 아닐까.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이유는, 오르는 15초가 아니라 떨어지는 3초이지 않나. 상승은 추락의 기대감, 전락의 희망이 아닐까. 결국 전락은 인간에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마지막 단계의 쾌락일 것이다. 추락墜落의 다른 의미는 ‘즐거움을 뒤쫓는’ 추락追㦡일 것이다. 아비가 달아준 날개와 조부가 지어준 이름을 떨치고, 거느릴 령領을 떨어질 령零으로 고쳐 쓴 건령도 저와 비슷한 생각이었겠지요.


말이 길었습니다. 건령의 이야기는 그만 접어두지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사랑입니다. 영화 <박쥐>를 8년 만에 다시 보며 강렬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타오르는 일출에 시커먼 숯으로 변한 태주 씨의 발목에서 상현 씨의 신발이 툭 떨어졌을 때. 이런 문장을 적었습니다.


사랑은 그야말로 자유요, 극도의 욕망이자 극한의 쾌락이다.


앞서 실존적 쾌락의 마지막 단계는 전락이라 썼지요. 그러므로 사랑은 전락이고, 추락의 과정입니다. 또한 역도 성립합니다. 사랑은 ‘살아있음’의 본능적인 욕망이자 궁극적인 쾌락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제가 본 <박쥐>라는 영화는 지금껏 사랑, 즉 ‘살아있음’을 제대로 느껴본 적 없는 상현이 서서히 전락하며 욕망과 쾌락을 겪어가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죽음’입니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곧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카로스에 빗댄 이야기처럼, ‘살아있음’에 더 극단으로 다가설수록 더 빠르게 ‘죽음’으로 다가섭니다. 즉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다르게 말하면 상현이 죽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상현과 태주가 한 것은 명백히 사랑입니다. 이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흡혈은 사랑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생존에 대한 욕망과 맛에 대한 쾌락, 두려움이 희열로 바뀌는 순간, 상대를 빨아들임으로써 나는 네가 되고 나를 빨도록 함으로써 너는 내가 될 수 있다는 환상, 서로가 서로를 가질 수 있다는 착각, ‘흡혈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가정에서 ‘흡혈’을 ‘사랑’으로만 바꿔도 성립하는 존재론적 이치. 더구나 사랑의 본성은, 희생하는 것뿐만 아니라 희생을 요하는 것이라는 점까지. 흡혈이라는 행위는 사랑과 정말 닮아있습니다.


그렇게 이 영화는 상현의 이야기에서 확장해 다시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태주가 끼어듦으로써 이 영화는 ‘사랑이 탄생하여 죽어가는 이야기’가 됩니다. 박찬욱 감독도 사랑을 추락의 과정이라 생각했을까요. 어쩐지 영화에서 하강의 메타포가 도드라집니다. 신과 가까운 위치에 있을 수 있던 신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뱀파이어가 된 상현. 태주를 안고 높은 건물에서 신나게 떨어질 순 있어도 올라갈 땐 터벅터벅 계단을 이용합니다. 그는 흡혈할 때도 늘 낮은 자세에서 일용할 양식 정도를 얻었습니다. 강우가 죽음에 이르는 방식은 저수지에서 무거운 돌과 함께 가라앉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집안이 몰락합니다. 더 이상 전락할 밑바닥도 없어 보이는 삶을 사는 태주는 어떨까요. 상현을 만나 유일하게 날개를 단 듯 상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현에게 “우리 이제 헤어져”라 뱉는 순간 추락해 코가 깨집니다.


정리하자면, 이 영화는 사랑이 탄생하여 죽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은 극도의 욕망이자 극한의 쾌락이며, 쾌락의 궁극은 전락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전락이고 추락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며 살아있음을 느끼고, 결국 죽음에 이릅니다.


영화에서 사랑이 탄생하는 순간. 그 순간을 의식하고 상현은 아룁니다.

기도문을 빌린 혼인 서약문처럼 들리는 바로 그 대사입니다.

(얼핏 출산의 현장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내 심장은 항상 당신을, 오직 당신만을 위해 뛰겠나이다.
끝내 행복해질 것임을 굳게 믿사옵니다."


영화에서 사랑이 죽는 순간, 그 순간엔 하나였던 둘이 이젠 각자가 되어 서로만의 대사로 끝을 달랩니다.

이별하는 연인이 서로에게 하는 성숙한 말처럼.

"태주 씨랑 오래오래 살고 싶었는데.. 지옥에서 만나요."
"죽으면 끝.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이는 유언이자, 사랑의 죽음을 가장 숭고한 방식으로 맞이하는 애도입니다.


얼마 전 친한 누나를 만났습니다. 누나는 최근 연기를 배우고 있다고 합니다. 시나리오 속 인물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어느새 살아 숨 쉬는 그 사람과 ‘나’가 하나가 되려면 마음의 공간이 얼마나 넓어야 할까, 그 순간은 참 숭고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 누나가 ‘초목표’라는 개념을 꺼냈습니다.


초목표는 희곡이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목표를 위해 배우가 행위로써 지향하는 도달점입니다. 또한 작품이 지향하는 초목표가 있듯 그 속에서 역동하는 인물들의 행위에도 각자가 지향하는 도달점이 있습니다. 인물들은 초목표에 따라 살아가고, 말을 뱉고, 행동을 합니다. 즉 희곡을 이해하고 희곡 속 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초목표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누나는 희곡 속 인물들이 그러하듯, 이 세상 모든 이들도 각자의 초목표가 있을 거라 했습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그의 초목표를 알게 되면ㅡ또는 알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ㅡ 충분히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제가 사는 이야기, 사랑하는 이야기, 이별하는 이야기, 죽어가는 이야기를 들은 누나는 말합니다.


“네 초목표는 ‘사랑’인 거야”


지금껏 살면서 사랑에 대한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읽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관하여 적잖은 글과 말을 뱉었습니다. 누나 말이 맞습니다. 제 초목표는 아무래도 사랑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행위는 사랑에 도달하기 위함입니다.


사랑을 깊이 사유할 때면 삶과 죽음은 늘 빠질 수 없는 카테고리였습니다. 삶과 죽음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주제였던 겁니다. 내가 삶과 죽음에 관한 글을 자주 쓰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랑을 빙빙 둘러 삶을 말했고 죽음을 썼습니다.


나는 잘 살기 위해 사랑을 할 것이고, 잘 죽기 위해 사랑을 할 것입니다. 나는 당장 죽지 않기 위해 사랑을 할 것이고, 오래 살지 않기 위해 사랑을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박쥐>는 제게 너무나 격렬하고 파멸적인, 짙은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살아있음을 느꼈고 죽음과 가까워졌습니다. 이제 이 영화를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사랑.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두 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입술과 혀를 짓찧으시어
그것으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며
손톱과 발톱을 뽑아내어
아주 작은 것도 움켜쥘 수 없고
어깨와 등뼈가 굽어져
어떤 짐도 질 수 없게 하소서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상현의 기도문
매거진의 이전글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