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맬컴과 마리>의 장면들
증오를 칼로 갈아 만든 사랑의 키스. 부르튼 입술에 피가 날 때까지.
어떤 영화는 관람 중 혹은 관람을 마치고 나서는 길에, 문장이나 이미지를 머릿속에 섬광처럼 비춘다. 그것을 재빨리 적고 현상하는 것은 나의 몫. 어떤 영화는 도저히 머리를 짜내도 한 문장이 안 나오기도 하는데, 번쩍 떠오를 때에는 그것이 내 가장 날 것의 감상이기에, 나로서는 내 무의식이 떠안긴 영감의 원천이 된다. 펄떡이는 그것들을 잘 제련하고 조리해 기억의 기록으로 남기면, 무의식과 의식이 뒤섞여 탄생한 '무언가'는 제법 그럴 듯하다.
작품을 관람하고 짧게라도 감상을 적는 일은 내가 중학생 시절부터 해오던 것이다ㅡ물론 그 시절의 기록은 설익고 낯부끄러워 지금은 나만 볼 수 있으며 시간 날 때마다 새로운 것으로 덮어 씌우고 있다. 혼자 해오던 작업을 처음으로 공개한 것은 6년 전으로 돌아간다.
대학생 시절 학부 내 영화 동아리를 창설해 운영할 때에 토론과 이야기를 나누고 말미에 꼭 '씨네노트' 시간을 가졌다. 그것이 무엇인고. 내가 야심 차게 구성한 코너인데, 사실 별 건 없다. 영화를 보고 떠오른 문장이나 이미지, 혹은 오늘 오고 간 대화 사이 떠오른 영감들을 꾹꾹 눌러 완결된 짧은 글을 공유해보자. 취지는 이랬고, 목적은 '훗날 우리가 이 영화를 떠올렸을 때 자신이 쓴 이 글만 봐도 설핏하게나마 감상이 떠오를 수 있도록'이었다. 꼭 '한 줄 평'으로 한정 짓진 않았지만,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니 동아리원들은 이를 '한 줄 평' 시간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그래서였나. 유독 이 시간을 어려워하거나 머쓱해하는 동아리원들도 꽤나 있었다.ㅡ지금 생각하니 나만 신났던 거 같기도. 미안하다!
여느 때처럼 활동을 잇던 도중 한 후배가 이렇게 물었다.
"근데 선배는 이런 문장들이 바로바로 떠올라요?"
나는 대답했다.
"(머쓱)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상영 내내 혹은 끝나고 보통 하나의 영감 덩어리는 떠올라요. 민망하긴 해도 영화관 갈 때 작은 메모장 하나라도 들고 가는 이유는 그걸 까먹지 않기 위해서 인데요. 그게 없으면 영화 보는 내내 그 영감 덩어리를 안 잊으려고 애쓰느라 집중을 못 하더라고요. 제가 되도록 영화를 혼자 보려 하는 이유는, 영화 하나 보는데 들고 가는 메모장이 유난스러워 보일까 봐 그렇기도 해요.(찌질)"
그도 그럴 게 어느 날은 분명 굉장히 좋은 덩어리가 스쳤는데, 영화가 끝난 후 그걸 떠올리느라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길을 잃고 버스를 놓치고 하차를 무려 네 정거장 뒤에서 했으니. 여간 번거롭고 날 신경 쓰이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맬컴과 마리>를 보면서는 첫 줄에 쓴 저 문장이 떠올랐다. 언젠가 나는 '애증'이란 단어를 오래 곱씹은 적이 있다. 애愛와 증憎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사랑하면 미워하고, 미워하니 사랑하는 거다. 물론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되는 게, '난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할 수 있어'라는 합리화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애愛와 증憎은 우리가 핸들링할 수 없는 감정의 영역인 것이지, 표출되는 증憎의 행동을 옳다고 할 순 없다.ㅡ간혹 이걸 착각해서 '사랑의 매' 따위의 기괴스런 개념이 나오기도 한다.
증오를 칼로 갈아 만든 사랑의 키스. 부르튼 입술에 피가 날 때까지.
감정에서 가장 주체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랑이라 믿는다. 그것은 자연스러워서, 그로 파생하는 수많은 감정들이 으스러지고 터뜨려진다. 사랑 속 증오의 모양은 어떠할까. 죽일 듯한 표정으로 노려 보며 칼날 같은 말투로 서로를 쏘아대다가도, 폭발력이 다하면 금세 키스를 퍼붓는다. 부르튼 입술끼리 맞닿으니 거칠게 피가 날 것이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증오할 만큼 사랑하니까. 맬컴과 마리는 내게 그런 관계처럼 보였다.
언젠가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왜 그토록 피 튀기는 잔혹한 장면만을 그리느냐의 평론가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흘러가는 삶이 나에게 가하는 폭력이 자신이 그린 그 이미지들보다 훨씬 힘이 세다고.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세계에 이미지를 되돌려주는 행위였다. 그것은 일면 세계에 대한 복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큰 사랑 없이는 증오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사랑은 베이컨이 삶에 대해 느꼈던 것처럼 가차 없는 힘을 가진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의 여정을 정신의 모험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힘이 이해할 수 없기에 강력한 만큼 우리의 존재는 통째로 흔들리고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뀌어간다.
(장혜령, 『사랑의 잔상들』, 문학동네, 13p)
영화 개봉은 성공적이었다. 모두가 감독을 칭찬했다. 그런데 그의 여자 친구는 왜 못마땅한 걸까. 화려한 파티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후, 둘 사이에서 긴장이 끓어오른다. <맬컴과 마리> 영화 소개
어떤 영화는 '영화 소개'만 봐도 느낌이 온다. '이 영화 나한테 참 좋겠구나.'
이 영화가 그랬다. 예상대로 서사에 밀도가 있었고, 무엇보다 역시 사운드트랙이 참 좋았다. 이로써 사운드트랙이 취향인 작품은 반드시ㅡ음, 정확히는 80% 이상ㅡ 내 취향일 것이라는 이론에 표본을 더했다.
어떤 영화가 내게 섬광처럼 영감 덩어리를 던져주는 것처럼, 어떤 영화는 또 음악을 던져주기도 한다. 간혹 '내가 이 영화의 음악감독이었다면 이 곡을 꼭 썼을 것 같다' 싶을 때가 있으니. 사실 <맬컴과 마리>에선 엔딩에 흘러나왔으면 싶었던 곡이 있었다. 내가 극도의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볼륨 왕창 키우고 악을 쓰듯 듣는 음악. Alabama Shakes의 Gimme All Your Love. 이 노래는 들을 때마다 다 XX 부숴 버리고 싶다.
So much is going on
But you can always come around
Why don't you sit with me for just a little while?
Tell me, what's wrong?
If you just give me all your love
Give me all you got, babe
Give me all your love
Bit more
So tell me what you wanna do
They say the world, it doesn't fit with you
Why don't tell to me just a little while?
I can only try to make it right
If you just gimme all your love
Gimme all you got, babe
Gimme all your love
Give me all your love
Give me all you got, babe
Give me all your love
Gimme All Your Love / Alabama Shakes
우리가 사랑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아주 쉽다. 내가 가진 모든 사랑을 몽땅 퍼부어 주면 된다. 조건 없이, 재지 말고, 미워 말고. 그런데 당연히 그게 잘 안 된다. 사랑하면 너를 갖고 싶지만 갖지 못해 안달 나고 화가 나며 가끔은 내 것이라 착각하고, 그런데 내 뜻대로 되질 않고 너는 네 맘이 있고 나는 그걸 미워하고 또 파괴하니까. 내가 사랑의 본질은 '아이러니'라고 주야장천 써 재끼는 이유도 그런 부분이다.
'잘' 하는 사랑은 그러면 무엇인가. 나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단상의 중간 결론은 이렇다. 결국 사랑이 가진 모든 아이러니를 껴안은 채, 증오를 갈아 만든 키스를 퍼붓고, 부르튼 입술에 피가 날 때까지 그런 다음 피가 난 서로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것. 그리고 ㅈ조금 있다 또 다시 부르짖는 것. 네가 가진 사랑을 모조리 달라고.
P.S. 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이다. 건강을 해롭게 하는 사랑ㅡ이라 믿는 사람ㅡ은 끊어내자. 사랑이 때론 폭력적인 속성을 갖곤 있으나, 명백히 폭력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