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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상명 Mar 01. 2022

소중한 것들은 모두 현상의 과정이 필요하다

장혜령 산문집 『사랑의 잔상들』을 현상하며

사랑은 실패로써 완성된다. 사랑이라는 목적은 거절과 좌절을 감수하는 자만이 도달할 수 있고, 사랑의 본질은 균열과 소멸을 거듭하며 또렷해진다. 실패하지 아니하면 영원히 완성할 수 없는 사랑의 파괴적 아이러니. 내가 사랑의 과정 만큼, 이별과 애도의 과정도 그 이상 중요시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만들어낸 잔상까지도 우리는 깨끗이 현상해내야 하기에. 그래야 사랑은 뜨겁게 전소하여 비로소 마음의 재를 털어낼 수 있기에.


장혜령의『사랑의 잔상들』을 필사하기 위해 다시 펼쳤을 때, 이 책은 비로소 현상의 과정을 거쳤다. 처음 읽었을 때 보이지 않았던 이미지가 느껴졌다. 잔상을 다루기에 더없이 좋은 글이 아닌가. 뒤돌아 보지 않았더라면 이 책은 내게 미처 말끔히 끝내지 못한 사랑의 습기처럼 찝찝하게 남았을 터.


우리에게 그 어떤 소중한 것들은 모두 현상의 과정이 필요하다. 흘러가는 우리 현재는 너무나 불완전하기에. 불완전한 현재를 꼬박 채워주는 그 어떤 소중한 것. 나에겐 사랑이 그렇고, 글이 그렇다. 그래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포기할 수 없는 것.


Michael Ackerman

이상하게도 우리는 결별의 목전에 이르러서야 가장 깨끗하고 투명한 시간을 경험한다. 진실이란 결국 어떤 ‘대면’을 필요로 하고 결별은 거꾸로 대면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 대면은 결국 홀로 맞서야 하는 고독한 싸움이다. 그러나 사랑의 경우처럼 그 사건 안에 종속되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그것을 대면하지 못한다. (장혜령, 『사랑의 잔상들』, 문학동네, 87p)


“나는 그 사람의 실체를 매 순간순간 확인하며 살아가려나 봅니다. 모든 장소, 모든 시간 속에, 그 사람의 본질이 깊숙이 박혀 있습니다.”(쓰시마 유코, 「산불」, 『나』, 유숙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


그녀의 어조는 담담하지만 내용은 끓어오른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의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것, 사랑받는 이가 결코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없으리라는 슬픔과 비장한 확신에 가득차 있다. 그러나 시도가 언제나 실패로 끝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실패를 기꺼이 감수하는 자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현재를 있게 한 그 모든 시간을 알고자 한다. 몇 개의 순간들은 하나의 선으로 연장시킴으로써 눈앞의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파악하려 애쓰기도 한다. 그러나 연인은 현재의 한순간을 잠시 공유할 뿐이고 이 연결은 영원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언제나 다른 한쪽으로부터 찢겨나가 분리될 수 있다는 비밀스러운 공포가 연인에게 있다.

(장혜령, 『사랑의 잔상들』, 문학동네, 103p)


실비나 오캄포의 소설 『연인 속의 연인』은 더 끔찍한 차원으로 나아간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이 꾸는 꿈의 세계까지 알고자 한다. 그들은 다정하게 몸을 섞는 정도를 넘어, 머리를 붙이고 잠들며 같은 꿈을 꾸는 하나가 되고자 한다. 사랑하는 이의 무의식을 소유하고자 하는 불가능한 욕망은 삶보다는 죽음의 세계와 맞닿아 있기에 연인의 세계는 반사회적이고 퇴폐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를 삼켜 몸속에 집어넣은 채 그의 목소리를 영원히 듣고자 한다. 또 반대로, 목소리가 된 사랑받는 사람은 그가 거주하는 연인의 꿈속 공간 전부를 지워버리고자 한다. 모든 지독한 사랑이 그러하듯.

사랑하는 이가 나타나기 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한 사람이 죽더라도(그 죽음이 물리적인 죽음이든 사랑의 소멸을 뜻하는 상징적인 죽음이든 간에), 죽은 자의 혼과 꿈이 이 세계에 깃든다. 그렇게 변경된 세계는 이후에 살아가는 다른 이들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사랑이 생겨나고 또 소멸하면서 세계는 지금도 변경되고 있다. 우리의 사랑은 애초부터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의 힘에 종속되어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어느 날 돌연히 당신이 그 속에 빠져들었듯이.

(장혜령, 『사랑의 잔상들』, 문학동네, 105p)


어떤 문장들은 단숨에 우리의 시선을 낚아채지만 어떤 문장들은 서서히 그 속에 스며들 것을 요구한다. 

(장혜령, 『사랑의 잔상들』, 문학동네, 145p)


속내 이야기를 쓰는 것은 좋지만, 속이 들여다보이도록 써서는 안 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중략)

그것은 글쓰기에 관한 조언이라기보다 마치 사랑에 관한 수수께끼 같았다. 마음을 다 보여줘선 결국 상대를 떠나게 할 뿐이라는. 조금만 드러내야 상대에게 굼금증을 남길 수 있다는. 속내를 모두 꺼내 서로 나누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거나 우정이라 믿던 스물다섯의 내게 그 충고는 무척 가혹한 것이어서, 나는 가끔 그 문장 앞에서 울기도 했다. 나를 다 드러냈을 때 공명할 수 있는 존재란 세상에 없는 걸까.

(장혜령, 『사랑의 잔상들』, 문학동네, 211p)


다 보여선 안 된다는 문학 선생의 말은 우리 삶의 비밀에 관한 거친 충고였다고, 이제는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인간인 내가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사랑이 있으며, 당신이 있으며, 운명이 있다. 그러므로 비밀로 남겨둬야 하는 것이 있다. 다 보여선 안 된다는 것은 비밀을 지킴으로써 당신이 내 안에 머물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어쩌면 씁쓸하겠지만,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당신이 그 안으로 들어와 해석할 공간을 남기는 일이다.

(장혜령, 『사랑의 잔상들』, 문학동네, 213p)


나는 아버지의 자살을 모티프로 소설을 쓴 작가 데이비드 밴을 떠올렸다. 그는 단지 아는 것을 재현했는가. 아니 그는 모르는 것을 썼다. 가족이라 해도 아버지가 죽음을 결행한 그 순간, 그 고독을 아들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에 이해하려 글을 썼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것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그것이 가장 통절한 일이다. 그러나 간절히 다가가려 했던 시도가 남는다. 어쩌면 그것이 쓰기의 전부다. 사랑의 전부다. 당신의 뒷모습에 다가가, 당신에게 닿고자 했던 그 손. 그 손이 전부다.

(장혜령, 『사랑의 잔상들』, 문학동네, 2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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