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당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장면들
한창 사랑 타령을 하고 다닐 때 몇몇 지인이 이 영화를 권했다.
모르는 영화가 아니었다. 차라리 피한 게 맞다.
누군가는 종종 재촉하기도 했다. 왜 아직도 안 봤느냐며. (그러고 보니 일종의 의도가 있었을지?)
마츠코의 찬란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홀린 듯 영화를 틀었고, 마음이 흘렀다.
그렇게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이 영화를 그토록 피하고 미뤘던 이유.
나는 사랑을 생生 삼아 맹신하던 사람이 이토록 상처받고 고통받아 이내 망가지는 걸 보는 게 너무나 아프다. 생을 놓지 않기 위해, 사랑을 놓지 않으려 했던 마츠코.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도록 꽈악 안는 것을 좋아했던. 사랑이 곧 삶이라 노래를 부르던.
생을 비난하지 않고 누굴 탓하지도 않고, 겨우겨우 살아가던 사람이 사랑을 믿었다.
믿었던 것들은 철저히 그를 내쳤지만, 마지막까지 한 줌도 안 되는 생 의지를 다잡았다.
무참히 짓밟혔지만.
사랑을 맹신하면서도 문득 두려울 때가 있다.
사랑이 초목표이어도 될까.
삶의 나침반이 정말 사랑이어도 괜찮은 걸까.
그렇게 살다 크고 작은 위협에 직면한 적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살다 죽었을 때 누군가 "시시한 인생이 끝났다"고 뱉진 않을지.
한때는 사랑의 힘을 믿는 사람이 전부면 해결될 것이 아닌가, 하는 유토피아적 발상으로 사랑 전도를 하곤 했다. 그러나 신에 대한 믿음도 흔들릴 때가 있듯, 간혹 의구심이 들었다.
사랑에 대한 믿음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사랑 없인 너무나 퍽퍽하고 척박하기에, 난 여전히 사랑의 힘을 믿는다. 끝나지도 않고 질기게도 이어지는 시시한 삶이 되지 않으려, 그저 사랑의 힘을 믿는다.
마츠코는 사랑을 믿었지만, 사람들은 마음을 내쳤다. 마츠코는 숭고했다. 마츠코의 일생은 시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츠코의 일생은 혐오스러운 게 아니다. 어느 비평가의 말마따나 혐오 당한 일생이었을 뿐.
"왜..?"
마츠코는 사랑은 알았지만 혐오를 알지 못했다. 그게 이 영화의 아픈 지점이다.
사람을 믿진 않는다. 사랑을 믿는다.
왼쪽 가슴 아래에서 둥 하고 울리는 마음을 믿는다.
그 울림이 나를 향하든, 너를 향하든, 세계와 우주를 향하든.
믿을 것 없는 곳에서 유일하게 믿을 것은 그것밖에 없다.
구부렸다 몸을 쫙 펴서 별님을 잡아보자
구부렸다 몸을 쫙 펴서 하늘에 닿아보자
조그맣게 웅크려 바람과 얘길하자
몸을 크게 펴서 햇빛을 느껴보자
구부렸다 몸을 쫙 펴서 별님을 잡아보자
구부렸다 몸을 쫙 펴서 하늘에 닿아보자
모두들 안녕 내일 또 보자
구부렸다 몸을 쫙 펴서 배가 고프면 돌아가자
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돌아가자
おかえり
ただい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