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미온느인 줄 알았던 내 딸이 론이라니!
우리 딸은 놀이터에서 놀기, 책 읽기, 만들기, 태권도, 역할놀이, 수영, 여행, 과일 등 좋아하는 게 아주 많은 초등학교 2학년 아이다. 어렸을 때부터 행동이 느긋해서 키우기 어렵지 않은 편이었고, 커서도 우리 말을 잘 따르는 아이였다. 굳이 따지자면 행동파보다는 신중파, 대범하기보다는 소심했달까? 그래서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선생님 말씀을 안 듣거나 말썽을 부릴까 봐 걱정이 되기보다는 하고 싶은 말을 못 해서 끙끙대진 않을까 걱정이었다. 게다가 1학년 때는 남편과 나 둘 다 직장에 다녀야 해서 왠지 더 짠한 마음에 오버해서 걱정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입학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학교 참관수업이 있었다. 귀여운 작품이 벽에 가득한 교실에는 열댓 명의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숭이의 자리는 뒤에서 두 번째였다. 들어갈 때 눈인사를 하고 교실 뒤편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는데, 숭이가 옆 친구를 보는 척하면서 눈동자를 한껏 뒤로 돌려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딴에는 티 안 나게 엄마를 보려던 것 같았으나 누가 봐도 이상한 방법으로 나를 보고 있는 모습에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그날의 주제는 ’좋아하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계절, 친구, 음식, 동물을 종이에 그리고 발표하는 수업이었다. (종이에 그리는 시간에 “글씨로 써도 돼요?”라는 질문을 서른 번째 받으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던 담임 선생님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1분 정도 지나자 아이들은 앞, 뒤, 옆 친구들에게 몸을 돌려 그림을 공유하고 떠들기 시작했다. 숭이도 주로 뒷자리 친구에게 자기 그림을 보여주고 키득거렸다. 발표 시간에도 먼저 손을 들고나가서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생각보다 숭이가 많이 컸고 적응도 잘하고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이 놓였다.
하루는 숭이가 수업 시간에 몰래 학 접는 법을 알려주겠다며, 눈은 선생님을 보면서 서랍 속에서 학종이를 접으면 된다고 했다. 오늘도 그렇게 몇 개나 성공했고 친구들에게도 방법을 알려줬다고 자랑스러워하며 말이다. 하지 말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선생님이 판단하실 일이라는 생각에 웃고 넘어갔다.
다음 날 선생님은 숭이네 반 아이들에게 쉬는 시간에 종이학을 접어 유리병에 가득 채우면 과자파티를 하자고 제안하셨다고 한다. 현명한 선생님 덕분에 숭이는 수업에 딴짓을 하다 혼나는 경험 대신 재밌는 프로젝트를 만들어낸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친구들과 열심히 학을 접어 1년 동안 두세 번의 과자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태권도 차 기사님 노래하는 거 몰래 찍어오기, 양치 시간에 비누거품 만들기, 풀똥 만들기, 연필 껍질 갉아놓기 등 모범생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을 보면서 내 딸이 헤르미온느보다는 론 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 번 인지하고 나니 그전 숭이의 행동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혼자 씻겠다고 하더니 온 화장실이 비누와 물 범벅이 되어있었던 것, 조용해서 방에 들어가 봤더니 화들짝 놀라며 뭔가를 숨기던 것 등등. 특히 입학 선물로 사준 책가방에 대문짝만 하게 본인 이름을 적어놨던 걸 보고도 내 아이는 말썽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게 더 어이가 없었다.
아이는 늘 내 생각보다 빠르게 성장한다. 매일매일 조금씩 변해서 가장 가까이 있는 나는 오히려 그 변화를 인지 못하고 계속 품 안의 아기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안 보는 동안에도 하지 말라는 건 안 하고, 뭐든지 나에게 얘기할 거라고.
하지만 점점 내가 모르는 아이만의 시간이, 아이만의 비밀이 늘어가고 있고, 그 안에는 내가 생각지 못한 것들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나만의 것들이 가장 즐겁고 달콤하고, 또 나를 성장시켰다는 걸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숭이가 나 모르게 귀여운 말썽을 부릴 줄 아는 아이라는 걸 알고 왠지 안심되고 기뻤다. 한편으로는 이제 아이에 대해 아는 척보다 모른 척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만의 시간에서 마음껏 경험하고, 마음껏 느끼고, 마음껏 성장하기를, 그래도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엄마에게 돌아와 주기를 오늘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