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아버린 딸 (1)
나는 유전을 믿지 않았다. 부부 두 사람이 아예 같을 수는 없기에 아이가 가진 특성을 조금 더 가진 사람을 닮았다고 치부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예를 들어 외향적인 아이라면 엄마, 아빠 중 조금 더 외향성이 높은 사람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숭이를 키우면서 '유전은 과학이다'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외모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숭이는 나를 훨씬 더 많이 닮았다. 잔머리가 많은 것, 엄지발가락이 큰 것,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한 것, 호불호가 확실한 것 등등... 그중 숨기고 싶은 나의 약점까지도 닮았다는 걸 느낀 순간이 있었으니 바로 줄넘기를 처음 시작할 때였다.
숭이가 8살 때 주변 친구들이 줄넘기하는 걸 보고 자기도 하고 싶대서 줄넘기를 사주었다. 익히기까지 연습이 꽤 필요한 종목이건만 이미 능숙한 친구들만 봐 왔던 숭이는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줄넘기를 몇 번 해보다 잘 안 되니 바로 포기해 버렸다. 마치 줄넘기는 시시하고 자기는 더 재밌게 놀 거라는 식으로 포장했지만 나는 숭이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친구들 앞에서 못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싫어 관심 없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그 모습이 나와 너무 닮아서 마음 한구석이 찔리고 어떻게든 고쳐주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 자존심 센 녀석에게 지금 더 해보자고 했다가는 역효과만 가져올 거라는 것도 알기에 꾹 참았다.
며칠 후 우리 세 식구끼리 한강 공원에 간 날 숭이는 다시 줄넘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한 번, 두 번, 열 번, 스무 번을 줄에 걸리던 숭이는 공원 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줄넘기 탓도 해보고 자기만 왜 안 되는지 한탄도 해가며 엉엉 우는데 그렇게 분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직 너무 일렀나 생각하던 찰나에 숭이는 다시 일어나 얼굴이 시뻘게질 때까지 연습을 하더니 기어코 몇 번을 넘는 데 성공했다. 그때의 그 뿌듯하고 행복한 표정이란!
나도 똑같았다. 줄넘기를, 리코더를, 자전거를 잘할 수 있을 때까지 혼자 연습하곤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잘하게 됐을 때에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했다. 이유를 생각해 보면 나는 내가 다른 친구들보다 성장이 느리고 운동신경이 안 좋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들과 같이 연습을 하면 훨씬 오래 걸린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아는 상태에서 친구들과 무언가를 시작하면 원래의 내 능력치만큼도 안 나오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감이 생길 정도의 실력은 만들어놓고 싶었던 것 같다. 한 마디로 내가 잘 못 하는 것을 할 때 멘털이 매우 약해지는 아이였던 것이다.
이런 나의 나약한 부분까지 닮아버린 내 딸. 처음에는 감추고 싶은 내 모습을 객관적인 눈으로 확인하는 것 같아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숭이는 내 약점뿐만 아니라 그걸 극복하는 오기까지 닮아 있었다. 숭이가 줄넘기를 해내는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내 딸과 나 자신이 너무너무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그날 밤 숭이에게 내 어린 시절 경험을 얘기해 주고 대화를 많이 나눴다. 그리고 숭이 역시 엄마처럼 처음에는 조금 느리지만 결국에는 해내는 사람이니 시작이 늦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그건 나 자신에게 해주는 말이기도 했다.
아이를 키우며 치유되는 경험을 많이 한다. 특히 나를 닮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랑스럽다 느낄 때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랑스럽게 여기게 된다. 이는 자식을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가져오는 놀라운 기적인 것이다.
장하다, 내 딸! 장하다, 나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