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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사람 Jun 20. 2024

믿을 놈 하나 없는 우리 가족 여행기-1

(유럽) 첫 신혼여행이자 배낭여행 #1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여름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우리는 신혼여행을 먼저 다녀오기로 했다.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3주 동안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가기로 한 것이다. 그때 우리에게는 돈은 없어도 패기와 시간은 넘쳐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부모님께 이러저러한 계획을 말했더니 마일리지로 우리 둘의 왕복 항공권을 쾌척해 주셨고, 남편은 누나에게 립스틱 지장을 찍은 차용증을 쓰고 500만 원을 현금으로 빌렸다. 이 은인들 덕분에 철없는 희망사항이 행복한 현실이 될 수 있었다.


별생각 없이 가장 저렴한 파리로 왕복 항공권을 예매하고 그제야 어느 나라를 갈지 정하기 시작했다. 유럽에 있는 모든 국가를 섭렵하고 나서 어렵사리 결정한 나라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이었다.

쉴 새 없이 이동하는 빡빡한 일정




드디어 3주 간의 유럽여행을 떠나는 날! 출발하기 전 한식을 꼭 먹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우리는 자주 가던 맛집에서 감자탕을 먹고 공항으로 향했다. 이때 너무 많이 먹는다 싶었던 우탄이는 공항 가는 길부터 속이 안 좋다고 하더니 결국 인천공항에 커다란 피자 한 판을 만들어 주었다. 화장실 휴지와 미화원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토를 치우고 시간 맞춰 비행기를 타는 데 성공했다. 아까 다 비워냈으니 괜찮아졌을 거라 생각했건만 우탄이의 장기는 성이 날대로 났는지 파리로 가는 14시간 동안 가라앉지를 않았다. 우탄이는 가는 내내 기내 화장실에서 토를 했고, 나까지 덩달아 기내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이때 내가 요거트라도 먹으려고 뜯었더니 "미안한데 냄새 때문에 토할 것 같아"라며 못 먹게 한 건 지금까지도 미안해한다.)


회항해 달라고 말할 뻔한 고비를 넘기길 수십 번, 드디어 샤를 드 골 공항에 도착했다. 파리에 오자마자 우탄이의 컨디션이 좋아졌다거나 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산송장이 다 되어 숙소에 도착했다. 우탄이를 숙소 침대에 눕히고 나도 좀 쉬려는데 우탄이의 "추워... 추워..."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나라만큼은 아니어도 라디에이터를 틀어놔서 훈훈했는데 컨디션이 안 좋아 춥게 느껴졌던 것 같다. 사장님께 연락을 드려도 다른 온열기구가 없다고 하셔서 결국 우탄이 침대를 라디에이터 옆으로 옮기고 이불로 칭칭 감아 재워버렸다.




다행히 다음 날 우탄이의 상태가 괜찮아져 그날부터 에펠 탑, 샹젤리제 거리, 루브르 박물관 등 유명 관광지를 열심히 다녔으나 별 감흥이 없었다. 파리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많았고 음식도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러다 4일 차에 몽마르트르 언덕에 가고서야 사람들이 왜 파리를 낭만의 도시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드디어 상상하던 파리의 모습을 만난 우리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느라 바빴다. 파리 필터를 씌운 것처럼 아무렇게나 찍어도 사진이 예쁘게 나왔다.

멋지다. 파리가.


그렇게 파리에, 그리고 우리의 신혼여행에 재미를 붙였을 때쯤 다음 도시인 '안시'에 가게 되었다. 안시는 호수가 유명한 소도시인데 그곳에 사는 사람의 블로그 글에 내가 꽂혀서 일정에 넣은 곳이었다. 문제는 겨울의 프랑스 소도시에서는 할 게 많지 않다는 점이었고 더 큰 문제는 내가 안시 일정을 3박 4일로 잡아놨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평화로운 장소와는 맞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깨닫게 해 준 4일이었다.

평화롭디 평화로운 안시



기대와 달리 안 좋았던 곳이 있으면 기대와 달리 좋은 곳도 있는 법! 다음 도시인 '샤모니'가 딱 그랬다. 샤모니는 설산이 예쁜 소도시인데 겨울에 딱 맞는 풍경을 가진 곳이었다. 샤모니로 가는 빨간 기차를 탄 순간부터 그곳을 떠나는 버스를 탄 순간까지 눈앞에 펼쳐진 설경에 내내 행복했다. 게다가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추천해 준 레스토랑에서 처음으로 맛있는 프랑스 코스요리를 먹었고 동네 햄버거 가게와 케밥 가게까지 실패가 없었던 맛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날씨가 안 좋아서 몽블랑 꼭대기에는 가지 못 하고 중간 봉우리에 갔다는 점이다. 그곳에서 점프 샷을 찍다가 휴대폰을 잃어버렸는데 케이블 카 직원이 찾아서 건네주며 자기가 "이글 아이(Eagle eye)"라고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휴대폰과 맞바꿀 뻔한 점프샷


이렇게 좋은 샤모니는 1박을, 심심한 안시는 3박을 예약했던 나 자신을 원망하며 아쉬운 발걸음으로 제네바행 버스에 올랐다. 로마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한 이동으로만 생각했던 이 버스가 이번 유럽 여행에서 가장 선명하게 남은 한 장면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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