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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사람 Sep 07. 2024

삼원숭 가족: 33살 부부와 9살 아이 이야기-15

이게 아닌데

얼마 전 언니가 살고 있는 시골집에 놀러 갔다가 농사일을 도와주러 온 스위스 친구를 사귀었다. 이전에도 그렇게 사귄 외국 친구들이 서울에 오면 연락해서 만난 적이 있어서 이번에도 sns 아이디를 교환하고 서울에 오면 만나기로 했다.


마침 친구가 서울에 와 있다고 해서 그 친구도 함께 비건 식당에 갔다가 한강 공원에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평일 저녁이라 숭이에게 나와 함께 갈 건지, 할머니와 집에 있을 건지 선택하라고 했더니 같이 가겠다고 했다. 비건 식당에 영어로만 대화를 하는 자리라 심심할 거라고 단단히 예고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숭이가 영어와 외국 문화에 더 흥미를 갖게 되었으면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렇게 약속 날이 되어 방과 후 교실이 끝난 숭이를 데리고 이촌으로 향했다. 가방에는 심심할 때를 대비한 색종이, 장난감 카메라, 필기구가 들어 있었다.


이때까지는 얼굴에 웃음기가 있었다


비건 식당에서 만난 스위스 친구들은 반갑게 숭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영어로.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이름과 나이가 그날 숭이가 그들과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스위스의 문화, 특징,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꽤 긴 시간이 걸렸는데도 잘 기다려주었건만 비건 치킨(사실은 콜리플라워 튀김)과 프레쉬 베지 샐러드(쌈장 후무스에 작고 예쁜 야채 몇 개를 꽂아놓은..)는 비건 메뉴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더욱 굳어지게 했다. 숭이는 콜리플라워 튀김의 껍질과 레모네이드로 배를 채워야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도 우리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고 한계가 온 숭이는 “졸려”를 연발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처음 시도해 본 비건 메뉴들을 꽤 많이 남긴 채 식당을 나섰다.


한강으로 가는 10여분 동안 나는 숭이와 한국말로, 스위스 친구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모두의 외국어인 영어로 대화할 때의 2-3배는 되는 속도와 양이었다.


한강 벤치에 자리를 잡고 나서는 다행히 내가 싸 온 뻥튀기도 나눠먹고, 장난감 카메라로 사진도 찍고, 줄넘기도 하며 숭이도 나름의 재미를 찾은 것 같았다. 그렇게 나쁘지 않은 만남이었다고 생각하며 스위스 친구들과 헤어졌다.




씻고 잠자리에 누워 여느 날과 같이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물었다. 숭이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나한테 신경을 너무 안 써줘서 속상했어. 난 스위스도 절대 안 갈 거고 비건 식당도 안 갈 거야. 다른 나라에도 안 가고 우리나라 콕할 거야.”


허거걱.. 내가 기대한 것과 정확히 반대의 결과였다. 세계를 무대로 넓게 꿈을 펼치며 살길 바랐는데 오히려 한국에서만 콕 박혀 살고 싶어 졌다니!


미안해, 우리 딸. 근데 엄마도 비건 식당 가지 말자는 건 동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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