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십자성

남극의 후예

by 세나당

벽에는 위아래가 뒤집힌 세계지도가 걸려있었다. 백야 덕분에 새벽 1시가 되도록 하늘은 희끄무레하고 별은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방에서 하나둘 나와 옹기종기 아지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각자 숨겨둔 비장의 아이템을 꺼냈다. 주머니에서 맥주가 한두 캔씩 나왔다. 브랜드는 제각각이었고 온기로 반쯤 데워져 있었다. 지은은 전임자가 몰래 챙겨준 형광 주황색 피스코싸워 (남미의 술)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경수가 군납용 카스를 들이째 꺼내자, 박수가 저절로 나왔다. 술을 마시지 않는 총무가 일 년 치 주류를 산 덕에 소주는 남아돌아 불판 닦기로 쓰이고 맥주는 한 달 만에 동이 나 초조하던 차였다.

여름의 남극엔 교수님 같은 연구책임자급부터 대학원생이나 외국에서 온 연구자들, 기지 유지보수를 위해 온 공사인력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의무실의 비공식모임에 모인 대부분은 남극의 인싸에 속하는 젊은이들 정확히 말하면 솔로들이었다. 지은은 인싸라기보다 장소제공이라는 파트를 맡아 그곳의 사람들이 풍기는 응축된 에너지를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각종 술 게임이 오갔고, 그중에서도 진실게임의 수위는 19금에서 39금을 넘나들어 아슬아슬했다.


문명의 불빛이 사라지면 사람의 이성도 같이 꺼지는 것일까. 맛집, 쇼핑, 금전거래가 없는 고립된 그곳에서, 사람들은 마치 태초의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원시적으로 자신의 신뢰와 애정을 증명하려 애썼다. 몰래 손편지와 함께 숨겨둔 맥주캔을 건넨다던가, 노래를 부르며 눈 맞춤을 하고, 기지의 끝자락까지 함께 산책하러 가거나, 공용 무전기로 방송하기, 근육 뽐내기 같은 각종 고전적인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심지어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며 남극 바다에 입수하는 이도 있었다.


희한하게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그때 남극에 온 사람들은 지구 반 바퀴 17,240km 거리의 한국의 연인들과 이별한 경우가 많았다. 그 헛헛함은 또다시 의무실로 모이는 원동력이 되었고, 술을 한참 들이켜다가 드디어 별이 뜨는 시각이 되면 오들오들 떨면서 삼삼오오 남극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기지엔 CCTV가 닿지 않는 수많은 곳이 있었다. 지번이 없는 길과 산 빙벽 그리고 바다가 무수했고, 자칫 사람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어 꼭 2인 1조로 다니는 것이 권장되었다. 사람들은 점점 자신들만의 파트너를 찾기 시작했다. 물론 꼭 다 이성끼리만은 아니었지만…….


그 무렵 펭귄들은 짝짓기를 시작했다. 갑갑한 의무실을 벗어나기를 호시탐탐 노리던 지은은 펭귄 개체 수 측정 연구 보조로 따라나설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겨울에 떠났던 펭귄들은 초여름이 되면 하나둘 돌아와 남극세종과학기지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펭귄 마을에 자리를 잡고, 짝을 지어 둥지를 애지중지 만든다. 수컷 펭귄이 조그마한 돌덩이를 하나씩 가져와 예쁘게 건네고, 암컷 펭귄이 동의하면, 짝이 성립된다. 암컷과 수컷은 외양으로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펭귄을 연구하는 박사님도 피를 뽑아서 유전자를 돌리기 전엔 구별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짝짓기 할 때는 확실히 위, 아래의 위치에 따라 암수를 구별할 수 있었다. 나름 펭귄들은 전희를 즐기는 것 같았는데, 서로를 만나면 먼저 크게 소리 또는 노래를 불러 자신의 짝이 맞는지 확인도 하고 날개를 펼쳐 서로에게 보여주며 둥지 주변에서 춤 같은 걸 추었다. 이런 의식을 한참 치른 후 진지하게 합체를 하면, 하나에서 셋까지 알을 낳았다. 펭귄의 육아도 쉽지 않았다. 한 명이 먹이를 구하러 간 사이 다른 한 명이 집을 지키며 12시간 교대로 알을 품었다. 펭귄만의 언어로 이 모든 절차를 배우게 되는 건지 모르지만, 매년 먼바다에서 헤엄쳐와서 새끼를 낳고 키운 후 다시 멀리 떠나는 일은 반복되어 왔다.

새끼 펭귄들이 태어난 들뜬 분위기와 함께 인간들의 짝짓기에 대한 소문도 기지에 퍼져나갔다. 기지 메인 건물에서 한참 떨어진 천체관측관에 남녀가 데이트를 한다더라, 누가 누구에게 고백했다더라 등도 있었지만, 주요 화제는 에서 온 S와 R의 로맨스였다. 회식 때 R은 노래방에서 소찬휘의 노래 Tears의 '잔인한 여자라' 파트를 'S야 사랑해'로 바꿔 불렀고, 둘이 잠시 사라졌을 때 건물 앞 노란 전등 아래서 스킨십하는 걸 누군가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 와중 S 없이 파티에 참석한 R은 그날의 타깃이 되어 짓궂은 질문에 답해야 했다. 무르익는 진실게임에 동참하며 지은과 경수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둘에 대해선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벌써 그보다 몇 주 전이었나 유난히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던 날이었다. 바다 건너 10km 떨어진 칠레기지가 몇 걸음 걸어가면 닿을 것처럼 보였다. 미세먼지가 하나도 없다는 건 이런 것일까. 그리고 그 날밤엔 별이 하늘을 완전히 채웠다. 북반구의 북극성처럼 남반구에는 네 개의 밝은 별을 이어 십자를 그리는 남십자성(Southern cross)이란 길잡이별이 있는데, 지은은 그 별을 찾는 법을 샤니나에게 배웠던 터였다. 그날 기지는 회식이었고, 지은과 경수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2인 1조의 산책과 트레킹 등으로 친해진 둘의 대화는 점차 혀가 꼬여가며 중단되었고, 지은은 잘 시간이라며 일어났다. 그러나 지은이 자려고 눈을 붙였을 때 경수의 톡이 왔다.

‘투명한 유리구 안에 들어온 것 같아.’

‘어딘데’

‘헬기착륙장’


그날 밤 지은과 경수는 남십자성을 찾지 못했다. 하늘 전체에 별이 너무 빼곡하였고, 별보다 빛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은은 바닷가에 서성이던 펭귄들과 뒤집힌 세계지도를 생각했다.

언덕배기에 진작 둥지를 틀고, 바다 전망에 햇빛을 정면으로 받던 펭귄들과 다르게, 자칫 잘못하면, 곧 쓸려내려 갈 것 같은 모래사장을 방향 없이 누비던 어딘가 무리에서 떨어진 듯한 엉뚱한 아이들. 그러다가 한참 늦게서야, 모래사장에 집을 짓겠다며 머리를 맞대던 몇몇.

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 곳곳을 떠돌겠다며 찾아간 남극에서 지은은 자신과 비슷한 어떤 남자를 만나 한국의 남쪽 바닷가에 정착하게 되었다. 사람이 희소한 극한의 환경에선 깊숙이 숨어있던 인간의 생명력이 반짝이게 되는 것일까. 또는 북반구에서는 볼 수 없는 남십자성처럼 사람의 인연이 교차하는 데는 어떤 특정한 시공간이 필요한 것일까. 삶이란 참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지은은 미소 지었다.


(끝)

이전 05화다시 돌아가고 싶은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