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가고 싶은 거리

그의 발등이 반질반질한 이유

by 세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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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바다다! 매일 바다를 보고 사는 데도 탁 트여있어서인지 이 바다는 새롭다. 호텔 바로 앞 해안을 따라 쭉 뻗은 길이 펼쳐진다. 지난번 왔을 때 나도 인증사진을 남겼던 ‘Punta Arenas’ 글자 앞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이 보인다. 저 멀리 배들도 떠 있다. 비수기라서 운행을 하지 않고 서있는 오스트랄리스, 남극 가는 유람선이다. 아, 저기가 서준이 이야기했던 카페구나. 가서 커피 한잔해야지.


두 번째 푼타 아레나스 방문. 이번엔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다. 약 8개월 전 시작된 남극기지 근무 중에 갑작스럽게 병원 진료를 위해 남극의 관문도시 칠레 푼타아레나스로 오게 되었다. 칠레 공군기 탑승부터 3시간의 비행과 도착, 바로 이어진 병원 방문까지 착착 일정이 진행되고, 다행히 결과가 괜찮아, 내일 남극으로 복귀하기로 했다. 큰 병이 아니라 걱정을 덜었다. 게다가 잠깐의 자유시간이 생겼다!


이곳이 이렇게 발전된 곳이었던가? 처음 방문했을 때 받았던 시골 동네의 인상은 어디 가고, 건물을 장식한 벽화들에 반짝이는 가로등, 또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까지. 여기가 도시였구나. 아, 그리고 꼬리를 흔드는 댕댕이들! 맞아, 푼타 아레나스 길엔 유난히 개들이 많았었지. 댕댕이들아 오래간만이야. 남극엔 너희 대신에 펭귄들이 있단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랐니? 먹을 게 없니?


오, 눈이 살포시 떨어진다. 바닥에 살짝 깔리는 눈. 촉촉한 눈이다. 눈이 거리에 떨어지고, 건물과 가로수에도 쌓이고……. 앗 길가에 꽃도 있잖아! 정말 반가워. 매일 보는 눈인데 남극의 눈과 푼타 아레나스의 눈은 다르다. 남극엔 나무가 몇 세기 전까진 있었다는데 지금은 사라졌다나? 나무가 없는 곳에 눈이 쌓여있는 남극은 깨끗하고 장엄한 느낌이라면, 나뭇가지와 이파리에 눈이 덮여있는 이곳은 포근하고 다정한 기분이다. 역시 난 나무랑 꽃 있는 곳이 더 좋다.


골목에 보이는 조그만 치즈 가게. 종류별로 나란히 놓인 덩어리 치즈와 하몽이 맛있어 보이는데, 어떻게 사야 할지 모르겠다. 스페인어라곤 우노(하나) 도스(둘) 그라시아스(고맙습니다)밖에 모르는 손님을 두고 주인아주머니는 구글 번역기에 친절하게도 여러 차례 설명했다. 결국, 알아낸 것은 많지 않지만, 맛있어 보이니까 기지에 사서 돌아가야지. 오래간만에 비자카드를 써본다. 역시 문명의 맛은 쇼핑이다.


저 멀리 음악 소리가 들리는 아르마스광장으로 발길을 향한다. 걸려있는 플래카드의 글자를 번역기를 돌려보니 농업진흥을 위한 행사를 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음악에 맞춰 짧은 전통의상을 입고 춤을 추고 있다. 코끝은 빨갛고 춤을 출 때마다 입으로 김이 새어 나오지만, 표정들은 살아있다. 비수기여서인지 관객은 나포함 몇 명 되지 않는다. 모금함에 동전이라도 넣어야 할까?


광장 중앙의 동상의 발을 쓰다듬어 본다. 지구를 일주한 위대한 탐험가 마젤란은 동상의 맨 위에 서서 먼 하늘을 보고 있다. 아래엔 여러 사람이 마젤란을 떠받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만져서 반질반질한 발등. 마젤란 아래에 앉아있는 원주민의 발이다. 이 발등을 만지면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전설이 있다. 지난번 여기서 다들 발을 만지고 사진을 찍었더랬다. 그러니까 오늘도 난 꼭 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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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가 점점 어둑해지고 추위도 몸속으로 새어 들어온다. 이제 슬슬 숙소로 가야지. 내일이면 다시 남극행. 아쉬운 하루가 끝나간다. 기지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마트에 들러 문명 세계의 과자들과 피스코(남미의 술 종류) 몇 병을 사서 몰래 캐리어에 넣어가야겠다.

전설대로 이곳을 다시 걷게 되는 날은 언제가 될까. 누구와 함께 오게 될까. 이번에 돌아온 것처럼, 분명 다시 오게 될 것이다. 숨을 한 번 더 깊이 들이마셔본다. 다음에 오더라도 몇 번이고 동상의 발등을 만질 것이라 다짐하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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