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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구역 Mar 04. 2018

그 행운의 편지 보낸 사람, 저예요.

사색의 삼구역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 밤,

오지 않는 잠은 부스러기 같은 기억을 꼬리에 꼬리까지 물고 와 한밤중에 하이킥을 하게 한다.

그래서 갑자기 뜬금없이 그때의 일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행운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국민학교를 다녔다.

디지털이라고 해봤자 모뎀의 속도가 전부였고, 필름 카메라 필터가 장착된 어플을 쓰는 게 아니라 진짜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친구와 연락하려면 친구네 집에 전화를 걸어야 했고, 보통 부모님을 거쳐 전화를 받는 경우가 많아 전화예절까지 배웠었다. 학교를 마치고 나면 6시에 하는 만화영화를 챙겨봤었고 지금처럼 채널이 다양하지 않아 또래 친구들이 보는 채널도 거기서 거기였다.

펜팔, 교환일기를 쓰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학생들이 보는 잡지 뒤편에는 펜팔 친구를 찾는다는 코너가 따로 있었고, 학교에서는 해외 펜팔부까지 있었다. 또 편지지를 잡지처럼 발행하는 월간지도 있었다.

바야흐로 편지의 붐인 시기였다.


국민학교 6학년 1학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실내화 주머니를 가지고 다녔는데, 그 속에 그 편지가 들어있었다.

오래된 일이라 편지지의 색이, 필체가 어떠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편지는 제법 나름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이상한 게 있다면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편지의 첫 줄을 읽자마자 보내는 사람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다는 그 편지, 행운의 편지이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한 바퀴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4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이 편지를 포함해서 7통을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 주셔야 합니다. 복사를 해도 좋습니다. 혹 미신이라 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영국에서 HGXWCH이라는 사람은 1930년에 이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비서에게 복사해서 보내라고 했습니다. 며칠 뒤에 복권이 당첨되어 20억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는 이 편지를 받았으나 96시간 이내 자신의 손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는 곧 사직되었습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고 7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다시 좋은 직장을 얻었습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이 편지를 받았지만 그냥 버렸습니다. 결국 9일 후 그는 암살당했습니다.
 기억해 주세요. 이 편지를 보내면 7년의 행운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3년의 불행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버리거나 낙서를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7 통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은 행운이 깃들 것입니다. 힘들겠지만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하세요. 7년의 행운을 빌면서..


이렇게 접었었다. 행운의 편지가 아니라 행운의 쪽지였으리라.


실제로 저 편지가 어떠한 힘이 있어 행운과 저주를 내릴까 의문을 가지게 되지만, 내용을 읽어보면 꺼림칙한 문구가 한둘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언급된 편지를 다시 보내야 하는 기한과 개수, 그리고 행운이 있을 몇 년과 불행이 있을 몇 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도 이 편지를 무시하고 지내다 암살을 당했다니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그 무서움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당시 괴담이었던 밤마다 책장을 넘긴다는 학교의 소녀상과 빨간 마스크, 그리고 홍콩 할매귀신을 정말로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편지지에 모나미 펜으로 내용을 옮겨 적었다.

혼자서 적기에는 생각보다 많은 양이어서 3통째 적다가 힘에 부쳐 편지 내용이 점점 짧아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행운의 편지를 들고나가 동네의 아무 집 우편함에 넣었다.

편지를 보내고 나서도 나에게는 행운이 찾아온다지만, 그 편지를 받은 사람에게 혹여나 불행이 찾아올까 봐 그 찝찝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인간은 삶의 한 치 앞도 볼 수 없으니, 그 한치를 볼 수 있을 거라고 확신을 주는 존재 앞에서는 나약해지기 마련이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행운의 편지는 오랜 세월 동안 누군가의 손을 거쳐 자신을 복제하고 있는지 모른다.


요즘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 혹여나, 만약, 얼토당토않겠지만, 또 그럴 일은 없겠지만,

행운의 편지를 받는다면 무시하기 바란다.

그대가 덜 쓴 종이 한 장과 펜촉의 잉크가 브라질의 나무 한그루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더 행운인 일이 아닐까!





추신 1. 그때 그 편지를 받으신 분, 마음을 괴롭게 했다면 지금도 정말로 미안한 마음입니다.


추신 2. 그렇다면 행운의 편지를 보내고 7년간의 행운이 찾아왔을까?

이것이 답이 될진 모르겠지만, 그로부터 며칠 뒤 외환위기 IMF 가 찾아오고, 사상 초유의 경제위기가 우리나라를 힘겹게 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성장통과 사춘기를 동시에 겪으며 88만 원 세대를 향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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