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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Feb 20. 2020

제주의 출근길

출근길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제주에서의 첫 출근날엔 여유롭게 나섰다. 조금 길을 돌아가서, 집 근처 바다에 들렀다가 출근할 요량이었다. 제주도에 사니까, 바다 근처에 사니까 출근 전에 바다 한 번씩은 봐야겠다는 생각에 들떠있었다. 여행하듯 제주를 만끽하면서!!


서울에 살 때는 운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완전한 초보운전자였다. 제주도에는 차량도 적고 나의 집과 직장은 시내가 아니라 한적한 동네니까 할만할 거라는 완전한 초보자다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천천히 차를 몰고 해안도로로 나갔다. 5월의 맑은 날씨와 적당한 온도, 선선한 바람과 빛나는 바다가 나를 반겨주었다. 이런 게 내 일상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출근 전에 이런 바다를 보다니. 차를 세워두고 좀 더 바다 가까이 걸어가 보고 싶었다.


너무 손쉽게 쟁취한 믿을 수 없는 행복에 들떠 나는 선을 넘고 말았다. 초보자는 넘지 말았어야 할 고난도의 주차 라인을. 넓은 자리 다 놔두고 왜 굳이 캠핑카 안쪽의 모퉁이 자리에 주차하려고 했을까. 아드레날린이 많이 분비되면 내 능력치도 올라간다는 착각에 빠졌던 것 같다. 결국 나는 차를 빼다가 캠핑카를 스치고 말았고, 아무리 살짝 스쳐도 차와 차의 부딪힘은 사람과 사람의 부딪힘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인생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이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멋진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일, 믿을 수 없을 만큼 적게 일해도 많은 돈을 주는 곳에 취직하는 일, 믿을 수 없을 만큼 저렴한 가격에 괜찮아 보이는 집을 계약하는 일... 결국은 그놈이 그놈이라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싼 게 비지떡이라는 진리를 되새기게 될 뿐이다.


일상은 여행이 아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곳에 살아도 매일이 여행이 될 순 없다. 예쁜 바다도 매일 보면 감흥이 떨어진다. 잠에 대한 욕구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자 하는 욕구를 손쉽게 이긴다. 자연스럽게 나는 오분 더 자고 집에서 곧장 회사로 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울에서의 출근길보다 제주에서의 출근길이 행복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출퇴근 길에 예상 밖의 놀라운 광경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서울에서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제주의 북동쪽에 위치한 회사 근처에 살다가 서귀포로 이사 가고 나서 40분 거리를 운전해 다니게 되자, 그 확률은 더 높아졌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귀포에서 올라와 서성로 입구에서 딱 우회전을 해 산록남로에 들어섰을 때, 뜨고 있는 해가 물들인 하늘이 나를 맞이하는 순간.

정면에 펼쳐진 청명한 하늘에 떠있는 구름 모양이 한 폭의 그림 같을 때.

퇴근길에 동남쪽에서 서남쪽으로 달리다 보면, 내 시야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한라산의 경사가 너무 웅장한데, 그 속을 걷고 있는 작은 내가 상상이 될 때.

사려니숲길에 다다를 즈음, 뾰족뾰족한 나무들의 머리 끝을 차가운 바람이 스치는 게 느껴질 때.

오후 네시에 퇴근하는 날, 서서히 지는 해가 뿌리는 따뜻한 햇살에 억새가 반짝이며 흔들릴 때.

산 아래 저 멀리 바다에 하나 둘 한치잡이 배가 별처럼 떠오를 때.

저 멀리 뾰족 솟은 한라산이 머리에 하얗게 눈이 쌓여있을 때.

낯선 곳으로의 여행에서는 낯선 공기와 냄새에 설렌다. 그래서 이건 여행은 아니다. 매일 다니는 출근길일 뿐. 하지만 익숙한 공기와 외워서 다니는 길에서 갑자기 만나는 설렘, 그게 있다.


그러나 아무리 놀라운 광경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높다고 해도 다시는 30분 이상 가야 하는 회사에는 취직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침 시간에 오분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그만한 행복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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