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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Feb 28. 2020

하드웨어적인 행복

고향을 떠나 연고 없는 낯선 제주에서 살면서 가끔 시린 느낌의 행복이 찾아왔다. 좋긴 한데, 난생처음 겪어보는 거라서, 이게 진짜 좋은 건지, 잘 모르겠는 그런 행복. 어릴 적, 어깨를 다친 내게 엄마가 맨소래담을 발라주었는데, 너무 차가운 느낌에 이게 추운 건지 시원한 건지 아픔을 해소해주는 건지 몰라서 이불을 세 겹이나 덮고 있었던 것처럼. 어디에서 살 지, 어떤 일을 할지, 누구와 살 지에 대해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의 이 자유가 너무 행복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래서 시린 느낌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첫 수업을 들은 날, 들뜬 마음으로 오전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카페에 앉아 노닥거리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제 점심은 무얼 먹을지, 점심 먹고 나서는 뭘 할지를 오로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걸. 0교시부터 야간 자율학습 시간까지 학교에서 보내고 집에 오면, 하루 일과 중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잠자기 전의 한두 시간이 전부였다. 몇 달 사이 내게 주어진 자유의 크기가 어마어마해 실감이 안 났다. 미친 듯이 행복을 만끽하기보다는 조금 두려워했던 것 같다. 이 시간을 정말 내 마음대로 써도 되는지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이 그대로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만으로, 스무 살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이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니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얼마 가지 않아 내게 허락된 자유가 반쪽짜리임을 알았다. 처음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라고 생각했는데, 익숙해지고 나서 보니 내게 주어진 건 낮시간에만 국한되는 절반의 자유였다. 부모님은 내게 밤 10시 이후의 시간에 대한 자유는 허락하지 않았다. 10시 통금에 반항하는 내게, ‘네가 아들이었으면 밖에서 노숙을 하든 집을 나가 뭘 하든 아빠도 신경 안 쓴다. 네가 딸이니 그렇다’며 화를 내셨다. 아빠도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그런 것임을 내가 알면 조금은 덜 하겠지 생각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더 싫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통금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억울했다. 걱정하는 아빠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자유롭고 싶은 나의 마음을 접어두어야 하는 상황이 힘들었다. 나는 아빠가 아니기 때문에.


짐을 싸서 제주 공항에 처음 내리던 순간은 잊을 수 없다. 여행하러 셀 수 없이 드나들었던 제주 공항인데 그날의 공기는 달랐다. 자유의 땅에 발을 내딛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눈 앞에 펼쳐진 자유가 주는 모순적인 두 감정, 짜릿함과 두려움. 오로지 나의 선택에 달린 앞으로의 시간들, 누구도 이끌어주지 않고 혼자 걸어가야 하는 길에 들어섰기에 느끼는 두 감정이었다.  


제주에 살면서 온 몸으로 느꼈다.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사실, 내게는 어느 지역, 어느 나라에 살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와, 무얼 하며 살 지에 대해 아무도 규칙을 제시하지 않는다. 맛있는 걸 먹고, 재밌는 걸 보는 것이 소프트웨어적인 행복이라면, 누구와 살지, 어떤 형태로 살지, 어떤 하루하루를 보낼지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행복은 하드웨어적인 행복이다.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상태가 되자, 아빠가 떠올랐다. 아빠는 내게 납득할 수 없는 규칙을 강요하는 존재였다. 여자니까 일찍 다녀야 한다, 여자니까 시집가기 전까지는 집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있는 힘껏 반항했다. 아빠와 나는 공존할 수 없는 관계 같았다.


이제 나는 아빠의 통제에서 멀리 벗어났다. 아빠도 그렇게 느끼신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빠와 나는 더 이상 우리가 통제하고 통제받는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아빠와의 관계가 달라졌다. 나의 반항은 아빠라는 존재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납득할 수 없는 규칙에 대한 반항이었다. 아빠라는 사람은 그 규칙을 적용해야 옳은 아빠라고 배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임을 알았다. 나는 아빠를 많이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한다는 걸 느낀다.


내가 이렇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만큼, 아빠도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너희들  키우고 나면 아빠는 시골 내려가서 농사짓고 살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었는데, 언젠가부터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환갑을 훌쩍 넘긴 지금도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아빠.


어느 날, 서핑을 하고 집으로 돌아는 길에 너무 기분이 좋아서 갑자기 아빠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졌다.

“아빠! 나 서핑하고 집에 가는 길인데 기분 좋아서 전화했어!”

다음 날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엄마랑 아빠랑 스피커폰으로 통화한 건데 너무 기분 좋았어. 근데 이제 기분 안 좋을 때도 아빠한테 전화해도 돼.”


기분이 좋을 때도, 힘들 때도 아빠에게 먼저 전화하는 일이 없었던 나는, 이제 아빠한테 편히 전화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빠가 보고 싶어 일부러 서울에 가기도 한다. 통금으로 묶어두려  때에는 벗어나고 싶어 애를 썼는데, 자유롭게 날개를 달자 사랑하는 마음이 비로소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행복에 생각지도 못했던 행복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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