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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Mar 02. 2020

용기를 잃었을 때 꺼내 읽으려고 쓴 글

“다시 서울에 올 생각은 없어?”

“응 없어. 만약 계속 한국에 산다면 제주에 살고 싶어.”

“그럼 해외에서 살 수도 있다는 얘기야?”

“그럴 수도 있지!”


듣고 있던 엄마의 표정은 뭐랄까, 아연실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놀라움, 황당, 어이없음, 서운함, 걱정, 신기함이 뒤섞여있었다.


제주에 내려와서 살면서 얻은 용기는, 어디든 가서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용기라는 것이 호르몬과 같은 것인지, 때로는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나로 만들어주지만 때로는 자취를 감춘다.


오래된 소중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잘 살 수 있을까? 아직도 가끔 자려고 누우면 서울에 있는 옛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연락 한 번 해야지 다짐하며 잠들지만, 아침이 되면 간밤의 꿈과 함께 잊어버리고 만다. 새로운 곳에서 어려움을 맞닥뜨렸을 때, 새로운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유독 고향과 옛 친구들이 그립다. 오래된 모든 것들의 소중함을 ‘저버린’ 내가 새로운 곳에서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생긴다. 두려움에 긍정을 잡아먹히고 나면, 내 행복 찾아 용기 있게 제주로 떠나온 내가 아니라 고향을 ‘저버리고’ 온 내가 된다.


낯선 곳에서 삶을 일구어 간다는 것은 많은 설렘과 기회를 주지만 두려움과 외로움도 준다.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 문제는, 이 곳에서도 그저 살면서 겪는 어려움을 만났을 뿐인데, ‘제주에 괜히 왔나’로 화살이 간다는 것이다. 나는 확실히 안 좋은 기억부터 잊어버리고 아름다운 기억만 저장되는 쪽이라, 현재의 문제로 인해 마음이 불안정할 때 과거를 찾아가 익숙함 속에 위안을 받으려고 했다. 지금의 내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건, 과거의 내가 그럭저럭 잘 견뎌왔다는 증거일 테니.


하지만 현재가 힘들면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재를 바꿀 새로운 길을 찾아야지, 뒤돌아서 과거로 갈 수는 없다. 그런데 어느새 나도 이제 새로운 시작과는 어울리지 않는 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새로움, 변화보다는 인생의 후반부 쪽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른 살이 되던 해, 미국으로 장기 출장을 갔다. 나이가 육십인데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미국인 동료들을 보며, 내가 얼마나 젊은 지를 느꼈다. 나는 그 해에, 이제 서른이니 하던 걸 중단하고 새로운 것에 뛰어든다는 것에 어울리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서른은, 앞에 놓인 문들 중 몇 개는 닫혀가고 있는 나이인 줄 알았다. 미국에서 여전히 계속 새로운 문을 찾아가 열어보는 60대 동료들처럼 내 앞에도 여전히 많은 문들이 열려있다는 걸 알았다. 마음은 그대론데, 서류 상의 숫자가 30이 되고 40이 되고 50이 되었다고 해서 하고 싶은 걸 포기해야 하다니. 하마터면 그럴 뻔했다.


그런데 서른 살에 먹은 미국물이 오 년쯤 되니까 다 빠져버렸다.


장난이라 하더라도 말이 무섭다.

“우리 나이 많이 먹었다.”

“늦은 나이에 적성 찾았네.”

“내가 십 년만 젊었어도.”

무심코 내뱉은 말, 장난으로 웃어넘긴 말들이라 생각했는데 내 안에 남았나 보다. 어느덧 내 가능성의 크기를 스스로 줄여가고 있는 나를 보았다. 행복을 위해 도전하고 바꾸기보다는, 현재의 상태를 죽을 때까지 유지하며 버티는 나이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뒤에, 제주가 내게 서울처럼 오래된 소중한 곳이 되어있을 수도 있다. 서울은 더 오래된 곳이 되겠지. 제주에 처음 내려와서 사귄 친구들도 오래된 소중한 벗들로 남아있다면 좋겠다. 서울의 친구들은 더 오래된 소중한 친구들이 될 테고. 그리고 이십 년 뒤에는 또 다른 새로운 곳에서 ‘제주에 계속 살걸 괜히 왔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시간을 계속 흘러가는데 멈춰있는 과거를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니 죽기 직전까지 새로운 것에 도전해도 된다. 80세가 되어, 이제 곧 죽을 테니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지내야지 했다가 95세까지 살면 15년 동안 마무리만 하게 되는 거 아닌가. 지금부터 친해져도 칠십까지 가까이 지낸다 치면 삼십 년은 족히 넘게 우정을 나눌 수 있는데 말이다. 아니, 새 친구를 사귀기에 늦은 나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


지금 이 상태를 고정시켜둔 채 미래를 상상하는 건 쉽고 재미없다. 내가 사는 곳, 가장 자주 보는 친구, 직업, 하루의 일과들은 그대로 둔 채 내 모습만 늙은 상황을 상상해보라. 하지만 지금의 내 모습 중, 십 년 전에 예상했던 그대로인 부분이 하나도 없다. 십 년 전과 그대로인 부분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사명감에 휩싸여 평생 할 줄 알았던 일을 그만두었고, 태어나 쭉 살았던 서울을 떠났고, 매주 친구들을 만나 술을 먹어야 하는 내가 외진 곳에 살고 있다. 십 년 뒤엔 어디에 살까? 십 년 뒤엔 어떤 친구들과 어울릴까? 어떤 일을 할까?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될까? 현재의 모든 조건을 지우고 십 년 뒤를 제대로 상상해보는 건 어렵지만 흥미롭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것들이 생겨난다.


내가 또다시 용기를 잃고 나의 가능성을 없애고 내 앞에 놓인 새로운 길로 가는 문들을 닫으려 할 때, 이 글을 꺼내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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