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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Mar 06. 2020

날씨 좋은 곳에 산다는 것 축복이에요

어떤 장소를 생각했을 때 색깔이 떠오르는 경험은 좋다. 뉴욕을 생각하면 의외로 회색보다는 연한 갈색이 떠오른다. 새로 지은 건물들보다 연한 갈색의 오래된 건물들이 인상적이었다. 바르셀로나는 청명한 날씨 덕분에 진하고 깨끗한 색의 하늘과 가우디의 건축물들이 주는 알록달록한 느낌이 있다. 정글 속에 지어진 도시 같았던 발리의 우붓은 초록색 그 자체로 남아있고, 공교롭게도 미세먼지가 최악인 시즌에 머물렀던 치앙마이는 먼지색의 하늘과 함께 그것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푸르름의 조화로 기억된다.


제주도에 여행 다니던 시절, 공항에 착륙하는 순간부터 나를 설레게 했던 것이 있다. 바로 눈 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와 연두색 풀밭, 주황색 지붕의 조화. 이 세 가지 색깔이 한눈에 들어오면 내가 제주에 있다는 것이 벅차게 느껴졌다. 하늘색, 연두색, 주황색의 조화는 내게 제주를 상징하는 색깔이 되었다.

지붕이 주황색은 아니지만, 바다와 풀과 집

제주도 자체가 화산섬이다 보니, 가끔 한라산의 경계가 헷갈릴 때가 있다. 한라산 자락은 바다에서 곧장 이어져 있기 때문에 한라산인 곳과 한라산이 아닌 곳을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 든다. 산자락의 끄트머리를 왔다 갔다 하며 일상생활을 하고, 가끔은 산 너머의 동네로 가기도 한다. 한라산을 타고 넘어 산길을 운전해서 산 너머의 동네에 갈 때에는 이미 한라산에 속해 있다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 기분은 한라산에 오르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게 하는 부작용이 있긴 하다. 띄엄띄엄 심어진 도시의 초록색 말고 군락을 이룬 제주의 초록색들은 자신들도 ‘생명’이라는 걸 뽐낸다. 이곳에서 그들이 살고 있음을, 여기에 사는 건 사람만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다.

한라산

주황색 지붕은 유난히 남국과 어울린다. 파란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한다면 그 어느 색인들 곱지 않겠냐만은 빨간색도, 노란색도 아닌 주황색이 최고다. 태양이 저물 때에도 하늘을 주황색으로 가득 물들이기 때문일까. 제주도는 서울보다 남쪽에 있어서인지 태양이 유난히 크게 느껴져서 더 확실한 노을을 보여준다.

제주의 노을

제주의 주황색 중에, 푸른 하늘과 녹색의 산자락을 배경으로 펼쳐진 귤밭의 주황도 빼놓을 수 없다. 겨울에도 푸르른 귤나무에 곳곳에서 불을 피우든 귤이 주황색으로 한가득 익으면, 겨울이 다 왔다는 증거다. 강풍에도 꿋꿋이 매달려있는 귤은 깜깜한 밤 사람들이 촛불을 피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추운 계절을 힘들어하는 내게 위안을 준다. 귤 수확이 끝나고 귤밭에 떨어진 귤들은 눈에 띄지만 보기 흉하지 않다. 밤에도 잘 보이는 현수막을 만들려면 주황색으로 만들면 된다고 했다. 겨울이 되면 귤이 어디서든 제일 잘 보인다. 날씨가 추워져도 시각적으로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니! 다른 어느 바닷가 동네에도 바다 옆에 주황색 지붕 집이 있을지 모르지만, 귤밭을 품고 있는 제주에 와서야 주황색이 얼마나 주변 환경과 조화로운지 알게 되었다. 주황색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이제는 주황색을 좋아하게 되었다.

귤밭

날씨가 좋다는 건 축복이다. 많은 날을 맑은 하늘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기분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제주에서도 직장은 직장이라 스트레스받는 건 똑같은데, 보다 빨리 힐링이 될 수 있는 건 집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알록달록한 자연환경 덕분이다. 힘든 일이 생겨도 변함없이 하늘과 바다, 산, 꽃, 나무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위안이 된다. 고작 사람 사이에서의 일 때문에 쓰러지거나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는 묘한 자신감을 준다. 그리고 어디로 떠나게 되어도 이들은 있을 테니, 나는 여전히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안도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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