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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Mar 31. 2020

새로운 곳에 온다고 새로운 내가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나는 삶의 우선순위를 바꿔보자는 다짐으로 제주에 내려왔다. 지난 10년 동안은 일을 최우선으로 삼았다면, 이제는 일보다는 내가 이 순간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남들은 다 결혼하는 나이에, 잘 만나던 남자 친구는 서울에 두고, 빈 몸으로 제주에 내려가다니. 연봉도 줄어들고, 가족과도 멀어지는데, 언제 올라오겠다는 기약도 없이 왜 제주에 가느냐. 나는 돈을 조금 벌어도, 틈틈이 서핑을 하러 갈 수 있는 곳에 살고 싶었다. 평일 저녁 6시 이후에도, 주말에도 해야 할 일이 늘 내 앞에 줄 서 있는 생활에서, 쉬는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로 옮겨가고 싶었다. 내 나름대로는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었다.


모두 예상하다시피, 연고 없는 곳에 홀로 이사 오면 많은 것이 재정립된다. 일단 눈에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서면 눈 앞에 건물이 보였다면, 여기서는 하늘과 오름이 보인다. 집을 나서는 순간 느끼는 감정이 달라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간관계가 재정립된다. 나의 경우에는 육지에서 하던 일을 정리하고 제주에  터라 인생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설령 장소가 바다 건너 섬이라 할지라도, 직장에서 파견 나간 경우라면 그나마 직장을 통해 이어지는 끈이라도 있을 텐데. 10 동안 몸담았던 분야의 일을 그만두고 나니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인간관계 역시 작동을 멈췄다. 학생 시절부터 관계를 맺어온 모든 사람들과 한 번에 멀어졌다. 그중에는 일을 떠나 인간적으로도 소중한 사람부터, 일이 아니었다면 가까이 지내지 않았을 사람까지 있었다. 연락을 이어갈 사람과 그러지 않을 사람이 단번에 정리되었다.


10년 동안 마일리지처럼 쌓인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많은 말을 듣고 하며 지내왔다. 이 모든 것과 단절된 곳으로 오니, 들리는 말도 적고 떠들 일도 줄었다.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느꼈다. 내가 얼마나 내향적인 사람이었는지를. 혼자서 보내는 시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외향적인 성격이 이상적인 성격이라는 인식 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외향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내향적인 본성과 외향적이어야 한다는 의지가 부딪힐 때마다 자괴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멀리 떠나와 조용히 지내면서, 내향적인 나의 모습을 직면하게 되니 내 안의 본성이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여가시간을 즐겼다.


무엇보다, 과거의 나를 힘들게 했던 상처들에게 안녕을 고했다고 느꼈다. 과거의 나를 둘러싼 공간, 사람들, 가족, 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곧 상처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는 거라 생각했다. 이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는 과거에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날 새로운 나와 과거의 나 사이에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우리 아빠 사전에 ‘말대답’이란 허용되지 않는다. 아빠가 말씀하시면 ‘예’ 해야만 한다. 나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아빠가 틀릴 때도, 내가 억울할 때도 있는데 말이다. 그럴 때 아빠가 틀렸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집안에선 대폭발이 시작된다. 아빠에게 ‘예’ 하지 않고 ‘말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왜 아빠는 아빠도 틀릴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을까? 아빠에게 내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을 왜 반항이라고 여길까? 나는 꼭 대화가 되는 남자를 만나야지, 생각했다. 폭발하지 않고 대화로 서로의 갈등을 풀 수 있는 관계를 원했다.


하지만 너무 강한 열망은 작은 시그널에 큰 의미를 부여해 오판을 하게 만드는 법. 나는 어떤 남자를 알게 되었고, 늘 웃고 화 한번 내지 않는 모습에 반해 연애를 했다. 온화한 그와는 대화로 갈등을 해결해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이에게 온화했지만 연인의 지적에는 폭발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얘기하는 불만이 그의 피해의식, 낮은 자존감을 건드리는구나. 작은 의견 차이는 늘 큰 싸움으로 번졌다. 나는 당신이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며 시작된 대화는 왜 나를 무시하냐는 그의 폭언과 욕설로 가는 직행열차였다.


내 의견을 말하면 폭언을 듣는 곳에서 나는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서인지 이제 아빠는 폭발하시지 않는다. 아빠와의 대화가 편하고 즐거워졌다. 폭언을 하던 그와는 진작에 헤어졌다. 한 때 그와 연인이었던 사실조차 잊고 지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한 반응에 나를 무방비로 노출시키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큰소리 나는 게 무서워서 울기만 했는데, 당당하게 말하고 나를 구출하리라 생각했다. 지난 상처로부터 빠져나오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곳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과 가벼운 말다툼을 하다가, 갑자기 예전 기억이 소환됐다. 나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내가 되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는 걸 알았다. 예전의 상처는 모두 잊고, 극복하고, 이제는 힘들어하지 않을 수 있다는 착각. 새로운 것들로 내 서랍을 다시 채웠다는 착각. 하지만 새로운 것들에 밀려 아주 깊은 서랍 속에 처박혀 있었을 뿐, 과거의 상처들이 없는 내가 되었던 건 아니었다.


과연  세상에 잊히는 상처가 있을까? 영유아 때의 경험도 모두 뇌에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 사건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때의 감정은 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무뎌질  잊히진 않는다. 그저 생각이  나는 정도가   나라는 사람에게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없다. 오히려 상처를 안고 살아갈 때보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상처가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가 더 힘들었다. 주변이 새로워져서 나까지 새로워진 줄 알았던 착각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했다. 외향적인 성격이 좋아 보여 내가 가진 외향성을 죄다 끌어모아 스스로 외향적인 사람인 줄 알고 살았던 것처럼, 아픈 상처를 깨끗하게 극복한 내가 되고 싶어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같은 실수를 한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이제는 이게 실수인 줄 조금은 안다는 것이다. 나는 그대로이지만 조금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매미가 허물을 벗는다고 해서 새로운 매미가 되는 건 아니지만, 허물을 벗고 나면 날개를 달게 된다. 나도 하나씩 허물을 벗으면서 조금씩 진화는 하고 있다. 허물 속에 갇사는 것만 아니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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