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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Mar 27. 2020

마트에서 회를 사도 맛있다니

내가 바라는 곳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가갑니다


“멀미한 생선에 소주 한 잔 하시죠.”

동해의 작은 해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배는 회에 소주를 마시러 갈 때면 항상 말했다. 바다에서부터 차 타고 올라와 멀미한 생선이라고. 도시에서 자란 내게는 적지 않게 충격적인 말이었다. 도시에는 모든 것이 완성된 상품의 형태로 존재한다. 나는 생선은 바다에서 잡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바다에서 잡힌 생선이 서울의 횟집까지 오는 과정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꺼내져 활어차에 실려 몇 시간을 달려오는 생선의 시간. 낯선 환경에서 몇 시간 동안 이동해 도착한 곳은 좁고 낯선 수조. 수조에서 팔리기를 기다리는 생선의 시간.


수조에서 팔리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생선에게 어떤 시간일까? 밥은 먹을 수 있는 시간일까? 만약 횟집 주인이 먹이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식한 물고기를 사 먹게 되는 거였을까? 어디서 어떤 회를 사 먹어야 맛있게 잘 사 먹는 걸까. 맛 좋은 해산물을 향한 어느 도시 사람의 고민이 시작된 순간이다.


물가와 해산물을 무척 좋아하는 나는,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을 항상 부러워했다. 태어나 처음 본 세상에 바다가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늘 상상해보곤 했지만,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여행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느끼는 약간의 이질감과 낯섦은 설렘을 가져다주었는데. 나의 생활 구역 속에 바다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설렐 수 있을지. 바다라는 것에도 과연 질릴 수 있을지. 어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끼니때마다 회를 한가득 먹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듣고, 싱싱한 해산물로 트레이닝된 그 사람의 미각이 탐났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을 어디서 보낼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내가 살 곳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면 갓 잡은 해산물에 언제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싶었다.


2010년 즈음부터 광어 한 마리 9,900원짜리 횟집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내부는 어판장에 간이용 테이블을 깔아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술이나 다른 안주는 일절 팔지 않아 밖에서 사 와야 하는 곳이었다. 다소 불편함이 있지만 가난한 학생이었던 내게는 최고의 가게였다. 술을 밖에서 사 오면 훨씬 싸고, 나는 회 외의 다른 안주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가 앞 골목에는 광어 소자를 만 오천 원에 파는 횟집이 있었다. 오징어회는 만원. 돈은 없는데 살아있는 해산물의 맛을 느끼고 싶을 때 자주 찾았다. 오징어회는 채 썰어 주는 가게가 있고 포처럼 얇게 떠주는 가게가 있다. 채 썬 오징어나 포를 뜬 오징어 모두 나름의 매력이 있다.


어쩌다 시내에 나가 한 접시에 삼, 사만 원짜리 회를 먹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날 것이면 다 좋았던 내 입맛에는 만 오천 원짜리와 삼만 원짜리는 체감상 비슷하게 느껴졌다. 후에 선어회, 숙성회, 유비끼 등 다양한 회를 접하게 되면서 점차 나만의 취향과 기준이 생겼다.


회라면 환장하는 나도 선호하지 않았던 회는 마트에서 파는 회였다. 활어회처럼 눈 앞에서 잡아주는 것도 아니고, 선어회처럼 맛있게 숙성된 것도 아닌 미리 떠서 포장해놓은 마트 회. 가끔 횟집 수조에서 탁한 눈동자를 가졌거나, 배를 까고 뒤집어져있는 상태 안 좋은 생선들을 봤던 터라, 혹시나 그런 맛이 간(?) 생선들을 잡아 떠 놓은 건 아닌지 의심이 드는 마트 회.


제주에 오고 나서 사람들은 해산물 많이 먹어 좋겠다고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이 먹을 수 없었다. 관광지의 해산물은 비싸다. 수산물 직판장에 가면 갓 잡아 온 다양한 해산물을 사 올 수 있지만, 멀다. 지하철로 노량진 수산시장에 갈 수 있던 때가 그립기도 했다. 좋은 숙성회를 제공하는 이자카야도 많지 않고, 우리 집은 산골이라 시내로의 접근성이 매우 좋지 않았다. 갑자기 회가 당겼을 때 먹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회고픔이 심해져갔다.


그러다, 친한 언니네 집에 놀러 갔던 날 언니가 마트 회를 사 왔다. 심지어 하나로마트에서.

“제주는 마트 회가 맛있어서 좋아.”

나처럼 해산물을 참 좋아하고 서울에서 살다가 내려온 언니여서, 그 한마디에 눈이 번쩍 뜨였다.

“여기 마트 회는 다 제주산이잖아. 육지에서 잡은 생선 넘어오려면 그 돈이 더 들겠다.” 


오랜만에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갑자기 회 생각이 났다. 회센터에 가보니 광어 한 접시에 만 사천 원. 고등어회도 한 접시에 만 사천 원. 대학생 시절 학교 앞 횟집에서 수돗물 비린내 나던 만 오천 원짜리 광어 한 접시보다 백배는 나았다. 그때는 돈 아낀다고 한 점에 한 잔씩 마셨기 때문에 초반 몇 점을 제외하고는 맛을 거의 못 느꼈지만. 상상했던 것처럼 항구에서 갓 잡아온 생선을 사 와서 먹는 생활은 아니지만, 마트에서도 충분히 맛있는 회를 사 먹을 수 있다니. ‘우리 동네는 삼다수가 제일 싸서 다 삼다수 사 먹어’, ‘동네분들이 하도 귤을 나눠주셔서 귤은 안 사 먹어도 돼’와 같은 급의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층 바닷가 마을에 사는 느낌이 든다. 내가 갈구해왔던 것들에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계속 다가가고싶다. 회 얘기를 한참 떠들었더니 오늘 저녁엔 회에 소주를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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