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주 Apr 22. 2020

달력을 보는 시간보다 나무를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제주도에 와서 길을 찾는 새로운 방법을 익혔다. 바로 산과 바다, 나무를 통해 길을 찾는 방법이다. 요가원을 갈 땐, 산방산을 바라보고 쭉 가다가 산방산이 바로 눈 앞까지 다가오면 산방산을 끼고 좌회전한다. 좌회전 후 산방산을 오른쪽에 두고 쭉 달리다가 왼쪽 유채꽃밭과 오른쪽 유채꽃밭을 지나, 산방산 끝자락에서 우회전. 지금 어디쯤인지 알고 싶다면 한라산이 어느 쪽에 있는지 바다가 어느 쪽에 있는지를 본다. 내게 자연은 모두 비슷비슷하고 길을 잃기 쉬운 곳이었는데, 이제는 자연에게서 길 안내를 받는다.


  집 앞 팽나무의 가지에 연둣빛 새순이 돋고 새순이 자라 초록빛 잎이 되었다. 몸통은 굵고 우람하지만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얇아지는 가지들이 촘촘하게 뻗어있는 팽나무. 겨울의 팽나무는 하얀 도화지에 먹물을 몇방울 떨어뜨려 입으로 후후 불어 그린 듯한 모양이었는데, 이젠 오밀조밀 뻗어나간 가지들의 모양을 초록색 잎들이 덮었다. 처음 새순이 올라올 때에는 이끼들이 낀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달력을 보는 시간보다 나무를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태양에 좀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나무가 알려준다.


  자연의 변화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똑같은 속도로 흘러가고 있음을 느낀다. 어제와 오늘은 비슷해보이지만 지난 주와 이번 주는 분명히 다르다. 애초에 시간은 분절 없이 흐르는 것이니, 꼭 24시간 단위로 시간을 잘라내지 않아도 된다. 여기 온종일 가만히 누워서 보낸 하루가 있다. 24시간을 기준으로 본다면 하루를 날린 게 되지만, 시간의 덩어리를 더 길에 두고 본다면 무언가를 진행해가는 과정 속에 잠시 쉬어간 시간이 된다. 어떤 시간 속에 두느냐에 따라 잃어버린 하루가 되기도 하고 반드시 필요한 휴식 시간이 되기도 한다.


  며칠 동안 집 안에만 있으면서 미드, 영드, 프드(프랑스 드라마), 스드(스페인 드라마) 속에 살았다. 자연스레 내 마음은 과거를 뒤지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웃거렸다. 현재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인도의 현자의 말에 따르면 마음이 과거에 있으면 후회스럽고 미래에 있으면 불안으로 가득차니 현재에 머물러 있어야 행복하다고 하는데, 현재에 머무른다는 건 무엇인가. 인간은 결국 과거들이 모여 미래를 향해 가는 존재 아니던가. 특히 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많이 매여있었다.


시르사아사나(물구나무서기)에 도전하기를 두려워하는 내게, 요가 선생님이 다가왔다.

“목이 뒤로 꺾일 것 같아서 못하겠어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하지 마세요. 이 순간에만 집중하세요. 두려움만 없애면 할 수 있어요.”


  요가원 창 밖으로 푸른 정원이 보인다. 나무와 풀들은 미래나 과거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생존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나는 거울 옆 자리보다 창밖이 보이는 자리가 좋다. 자연을 통해 내가 이 순간 여기에 살아있음에 집중할 수 있다.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면 오히려 미래를 향해 상상 여행을 떠나게 되어, 나무와 풀이 꼭 있어야 한다.


  자연 속에 둘러쌓여 산다는 건, 아름다운 풍경을 자주 볼 수 있다는 것 이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로운 곳에 온다고 새로운 내가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