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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Mar 06. 2018

라야의 생일잔치

발리 전통 생일잔치를 경험하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이라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 커튼을 열어본 남자 친구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 소리에 잠에서 깨 창밖을 보니 집 마당에 발리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우리 숙소는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주인집인 2층 주택과 1층짜리 방 7개가 마주 보고 있는 구조다. 각 방 앞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어 화창한 볕과 마당을 즐길 수 있게 되어있다. 마당에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군데군데 차양막과 이동식 베드가 펼쳐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주인집 집 문도 활짝 열려있었고 제단 같은 것이 차려져 있었다. 집주인 가족들은 전통의상을 멋지게 차려입고 손님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며 분주히 움직인다. 평소에도 집주인은 집 근처 사원의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독실한 힌두교 신자였기에 오늘 종교 행사가 있는 날인가 싶다며 남자 친구와 얘기하는 찰나, 우리가 일어난 것을 알아채고 집주인이 방문을 두드렸다. 


오늘 행사가 있어 음식을 차렸으니 좀 들어보란다. 방문까지 직접 두드린 적은 처음이라 평범한 행사는 아닌 것 같아 무슨 행사냐고 물으니, 손녀딸 라야의 두 돌 생일이라며 너무 해맑게 웃는다. 라야는 3대가 함께 사는 주인집의 손녀딸이다. 귀여운 목소리로 우리에게도 가끔 "할로~"라고 인사를 해주어 우리를 설레게 하는 존재다. 우리는 자다가도 밖에서 라야 목소리가 들리면 라야를 보기 위해 일어나곤 했다. 


씻고 방 밖으로 나와서 손님 접대용으로 차려진 간단한 다과를 받았다. 구운 바나나, 발리식 떡과 발리식 팬케이크였다. 집주인 가족들은 손님들을 위해 아이스박스에 음료수와 맥주까지 가득 담아 준비해두었다. 잠시 후 하얀 옷을 입은 나이 지긋한 남자가 오더니 가족들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 목탁 같은 것을 치며 기도를 했다. 힌두교식으로 아기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예배인 것 같았다. 아마 흰 옷을 입은 그는 힌두교의 지도자인 구루일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 라야. 기도가 끝난 후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모습.

예배가 끝난 후 라야의 가족들이 차려놓은 뷔페식 식사를 모두 함께 나눠 먹었다. 발리 전통 돼지 꼬치구이인 사테바비와 발리식으로 통돼지를 구워 껍질과 고기를 양념에 버무려 먹는 바비굴링, 발리식 닭고기무침, 나물 요리, 닭고기 수프 등 발리 전통 음식이 다양하게 차려져 있었다. 음식은 웬만한 맛집들에서 먹은 것보다 맛있었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잔치집 음식. 돼지고기 꼬치와 돼지고기 무침, 닭고기 무침 등.
손님이 모두 빠져나가고 난 후 마당. 정면에 보이는 라야.

그날 오후에는 발리 현지 가이드를 만나 투어를 했다. 현지 가이드에게 들은 바로는, 발리에서는 세계 공용 달력인 그레고리 달력과 함께 힌두식 달력을 쓴다고 한다. 이사나 결혼 등의 중요한 날짜는 힌두식 달력에서의 길일로 고른다. 생일도 그레고리력 상의 생일과 힌두식 달력 상의 생일 두 가지가 있고 힌두식 생일만 챙기는 경우도 많다. 아침에 본 라야의 두 돌잔치 풍경을 가이드에게 말해주니, 힌두식 전통 생일잔치라고 해줬다. 구루까지 와서 직접 기도를 해주는 것을 보니 부잣집일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맞다. 2층짜리 주택과 7개의 방에 민박을 놓는 집주인은 내가 본 발리 사람들 중 부자에 속한다.


우연히 경험한 힌두교식 전통 생일잔치는 곳곳에서 주인공 라야를 향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라야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듯, 집 앞에는 일주일 내내 신께 바치는 제물이 평소보다 풍성하게 놓여 있었다. 발리의 길거리 곳곳에는 신께 바치는 작은 제물 주머니가 놓여 있는데, 하루의 안녕을 신께 빌며 집 앞, 가게 앞에 두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손바닥만 한 크기인데, 라야의 생일 주간에는 2단, 3단짜리 제물이 놓여있었다. 

신께 바치는 제물을 집 대문 앞에 놓았다. 매우 화려한 편에 속한다.

어느 나라, 어느 종교든 사랑하는 이의 안녕과 행복을 비는 마음은 공통되겠지만, 라야의 생일 주간에는 그 마음이 더욱 느껴져 괜히 기분이 좋았다. 손녀바보인 할아버지의 사랑이 유난히 보기 좋았던 것인지, 행복한 여행 중이었기에 모든 것이 좋게만 보였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생일잔치의 메커니즘이 바로 이것이리라.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며 전한 행복이 다시 생일 주인공에게로 전해지게 하는 것. 어쩌면 어릴 적 내 생일잔치가 떠올라서 더 마음이 훈훈했을 수도 있다.


어릴 적 유난히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았던 나에게 친구를 만들어주려고 엄마가 썼던 방법은, 바로 생일잔치였다. 친구들에게 먼저 말을 걸지도 못하고, 다가오는 친구에게도 쭈뼛쭈뼛하여 어울리기 어려워했던 나. 엄마는 내 생일 때 온갖 친구들을 다 초대하자고 했다. 요즘에야 패스트푸드점이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생일잔치를 하는 것이 흔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에는 그런 문화가 없었다. 결국 집으로 직접 초대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그 당시 생일잔치는 음식 준비며 뒷정리까지 손이 아주 많이 가는 일이었다.

엄마는 아이들을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도 먹이고 재미있는 놀거리도 준비해 놀아주면서 내가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하셨다. 열댓 명은 족히 초대했던 것 같다. 부잣집은 아니었지만 엄마가 그날만큼은 힘주어 준비하셨던 기억이 난다. 내 생일잔치에 온 친구들은 너나없이 즐거운 기억을 갖고 돌아갔고, 나도 그날을 기점으로 친구들과 더욱 편하게 어울렸다.  


이웃과 친지들을 초대해 라야의 이름으로 음식을 대접하며 라야가 건강하게 잘 자라길 비는 라야 할아버지의 마음에서 이십오 년 전 우리 엄마의 마음이 느껴진 것 같다. 당시에는 너무 어려 잘 몰랐던 그 마음을 이국 땅에서 라야의 생일잔치 덕분에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올해 엄마 생신에는 미역국이라도 꼭 끓여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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