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 누구나 사랑하는 날씨. 누가 내게 봄과 가을 중 어떤 계절이 더 좋냐 물으면 단언코 봄이라 말했다. 두 계절 모두 코끝을 스치는 공기는 엇비슷하지만, 왠지 가을은 내게 더 쓸쓸하게 다가온다. 가을은 마치 내게 주어진 시간의 마지막이 다가옴을 알리는 것 같았다. 새로운 시작을 늘 설레하는 나는, 뭔가 마무리를 해야하는 때면 늘 조바심이 났다. 한껏 설렜던 그날의 기대를 채워야만 하는 부담이 나를 더 무겁게 누른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도저히 믿기가 어려운 때가 있었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평생 갈 것이라며,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확신했다. 스물 여섯, 4번의 계절을 두 번이나 한 그 사람과 이별을 하고는. 살면서 이토록 오래, 그리고 깊게 아팠던 때가 있나 싶을정도로 힘든 이별이었다. 분명 다른 사람들은 내가 견뎌온 시간보다 훨씬 더 빨리 회복한다 했는데,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가 이상한 사람이라 여겼다. 슬픔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것이 두려워 애써 밝은척했던 선택에 대한 댓가인가. 따뜻해지기 시작한 계절을 시작으로, 그 어느 해보다 뜨거웠던 여름을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때까지, 우리는 진작에 없었지만, 나는 아직 그 자리에 꽤나 오랜시간동안 머물러있었다.
그렇게 또 나는 도망치듯 떠나는 여행을 선택했다. 첫 이별부터 지금까지 이별을 마주하는 자세가 변한 바 없었다. 처음 느낀 감정을 회피했을 때 느꼈던 해방감을 경험삼아, 부디 이번에도 같은 방법이 통하길 간절히 바랐다. 그치만 그 바람은 내 오만이자, 일어날 수 없는 현실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신이 우리를 가르칠 때는 채찍을 쓰지 않는다. 신은 우리를 시간으로 가르친다
-발타자르 그라시안-
사실 지금의 이 감정이 언제쯤 괜찮아질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오래된 연인과의 이별, 그토록 열망을 가졌던 직업과의 이별, 그동안 정답이라고 생각해왔던 세상과의 이별, 나는 아직도 이별해야할 것이 너무나도 많은데, 아픈게 두렵다는 이유로 쉽사리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선택을 할 수 있는 때는 분명히 정해져 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변한 것은 한 풀 꺾인 자신감뿐이었다.
여전히 나는 남들의 눈치를 많이 보고, 나다운 것을 찾지 못한 스무살의 사춘기를 겪고 있다. 아니, 사실 나다운것, 그리고 나답게 살고싶은 것은 가슴 한 켠 깊숙히 묻어놨을 수도 있다는 찰나의 희망 때문에 지금의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2024.10.12 헝가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의 생각들
여러 도시를 다니며 내가 살고 싶은 도시를 내 마음대로 정하고 싶다, 근데 또 한국에는 언제든 돌아갈 안정적인 집이 있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들이 내 행보를 보고 동기부여를 얻거나 긍정적인 영향력을 받았으면 좋겠어. 몸이 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 시간이라는 압박속에서 벗어나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좋겠어.
행복: 안락한 침대, 걱정없는 편안함을 함께할 수 있는 누군가, 맛있는 음식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여유, 언제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자유.
고통이 나를 성장시켜줄거라는 확신은 생각보다 단단하지 못했다. 고통 앞에 나는 여전히 엄마를 찾는 어린 아이였고, 그만 성장해도 될 것 같다며 타협점을 찾는 비겁한 어른이었다.
나는 왜 내 인생을 억지로 사서 고생시킬까, 남들이 말하는 행복과 편안함에 나를 그대로 두지 않을까, 똥인지 된장인지 내 손으로 결단코 찍어먹어봐야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순응해야되는걸까, 여전히 나는 다를거라고, 노력한다면 바꿀 수 있을거라고 믿어야하는걸까.
'나의 26살은 너무나도 길어. 이 나이가 되면 멋있는 어른이 되어있을줄로만 알았어. 행복은 과정이라 하지만, 내가 쫓는 행복은 언제쯤 내게 다가올까를 초조히 기다려. 이렇게 고통의 연속들이 행복해지기 위한 과정이라면, 얼마나 행복하려고 이렇게 아픈건지.'
수많은 감정들과 생각들이 뒤엉켜서 차마 빠져나오지 못한 나를 구해준건, 다름 아닌 헝가리에 사는 소중한 인연이었다. 내가 유럽으로 떠나는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구세주같은 사람이었다. 예림이가 아니었다면 차마 이 크나큰 도전을 할 수 있었을까.
"힘 쓸 필요없이 그냥 차타구 오면 돼 편하게 와 언니. 내가 언니 먹을거 만들어놓을게.
일단 여행이잖아 즐기자. 저녁에 와인한잔 마시면서 수다떨고 야경보고, 유럽이잖아 확실히 여유가 달라. 나랑 있는동안 브런치도 먹구 산책도 하고많이많이 즐겨보자.중간중간 같이 공부하고 일하고 알차게 보내보자.
걱정마, 원래 오기전엔 걱정투성이야, 오면 싹사라져,언니 그냥 푹 자구 와. 나 여기 살잖아, 다~~ 있어, 한식도 해주고 먹을 것도 잔뜩해먹고 할 수 있으니까. 나 언니와서 너무 좋아"
-출국전 예림의 문자-
유럽에서 느낀 감정들과 내 머릿속을 뒤엎었던 생각들을 정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모든 생각들과 감정들은 기록하지 않으면 휘발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무작정 써내려갔다. 그리고 다짐했다.
봄이 와도 설레지 않을 것이고
여름이 와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거야
가을이 오면 무너지지 않고 견뎌 왔음에 감사하며
겨울엔 나를 지켜 줬던 그대만을 내 맘에 새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