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슬로우는 5단계에 걸친 인간의 욕구이론을 발표했습니다.
1단계: 생리적 욕구
2단계: 안정욕구
3단계: 소속감 욕구
4단계: 존중의 욕구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
단계별로 욕구가 해소되면 상위단계의 욕구가 자연스럽게 올라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욕구가 채워질 때 행복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제가 '느끼기도'합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아직도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딱 정의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행복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만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행복을 좇는다는 것은 어쩌면 굉장히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답이 정해진 것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각자 개인이 추구하는 것이 상황이나 가치관, 교육환경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이 귀결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바로 '행복'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불행에 빠트리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불행에 빠트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와는 상관없이 최초 선택의 기준은 자신이 행복할 것이라는 희망이나 확신 때문입니다.
저는 행복하라는 말이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꿈을 이루는 등의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들은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고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싫어하는 일도 해야 하고 싫어하는 사람도 만나야 하고 꿈을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행복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행복은 사실 굉장히 먼,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되어 버릴 수 있고 그것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거의 사망선고나 다름이 없습니다.
위에서 말한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이론은 욕구해소의 단계이지만 욕구를 해소하지 못한 인간이 가지는 감정은 딱 하나이며, 욕구를 해소한 인간이 가지게 되는 감정도 딱 하나입니다. 바로 불안과 평안(행복)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누군가가 저에게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묻는다면 행복할 수 있는 방법보다는 불안을 없애는 방법이나 평안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실제로 마음이 평안한 사람은 행복감을 더 잘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행복감과 평안함의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행복이라는 것은 마음이 평온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마음이 어지럽고 불안하고 분노하는 사람은 그 상태로 평안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굉장히 어렵기 때문입니다.(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으나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의 최상위이론인 자아실현욕구보다 궁극적인 욕구가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평안'의 욕구입니다. 자아실현을 한다고 해서 모두가 평안하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꿈을 이룬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20대에 꿈을 이룬 그는 죽는 날까지 행복하기만 할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성공한 사람들은 자아실현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며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바쳤지만 자아실현을 한 이후 찾아오는 성취감이나 행복은 아주 잠깐이며 금방 공허함이 밀려온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 공허함으로 인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망가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아실현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욕구가 바로 '평안'의 욕구이며 평안한 상태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죽는 날까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아이들과 가족, 그리고 제가 마냥 행복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평안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행복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평안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평안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어떨 때 가장 평안한가요? 평안하다는 것은 마음이 잔잔하고 평안한 상태를 말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저의 생각을 말하자면 '불안'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마음에 불안이 없는 상태, 불안한 것이 없는 상태가 평안한 상태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불안이라는 감정을 알 필요가 있겠네요. 불안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감정이며 또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감정입니다. 위험하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불안이라는 스트레스가 온갖 질병(정신적, 육체적을 구분하지 않고)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싫어하는 감정이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부정적인 모든 감정은 사실 불안이라는 감정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니 불안이라는 감정을 잘 알고 다룰 수 있다면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지배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서운하다는 감정도, 분노라는 감정도, 슬픔이라는 감정도 모두 불안을 전제로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평안은 다른 욕구와 다르게 단계를 밟아 생기는 욕구가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 항상 가지고 있는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안을 싫어하고 항상 평안한 상태가 되기를 원하니까요. 그래서 인간은 불안이라는 감정을 알면 지금 당장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불안은 뇌과학으로 볼 때 편도체가 활성화되면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편도체가 활성화되면 근육이 수축되고 체온이 올라가고 심박수가 빨라지는 육체적인 현상과 생각이 꽉 막히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정신적은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은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보다는 필사적으로 모든 근육의 힘을 동원해서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이는 생각이 동원되는 현상이 아닌 것이죠. 그래서 불안한 상태가 되면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습니다. 이는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대체로 생사와 직결되는 순간에 발생하던 현상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고 작은 일로 매일 불안을 겪고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의 육체와 정신은 매일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입니다. 생각은 그렇지 않아도 우리의 몸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는 상태에 계속 놓이게 되는 것이죠. 평안한 상태는 전전두엽이 활성화될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전전두엽과 편도체는 서로 시소와 같은 존재여서 편도체가 활성화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전전두엽이 비활성화되고 전전두엽이 활성화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편도체가 비활성화되는 것이죠. 즉 동시에 두 부분이 활성화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평안한 상태, 불안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은 편도체가 아닌 전전두엽이 활성화된 상태가 됩니다. 그렇다고 편도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편도체가 활성화되어야만 우리는 위험을 감지할 수 있고 생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가장 건강하게 편도체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은 '운동'입니다)
그렇다면 불안으로 인해서 편도체가 활성화되었을 때 가장 빨리 편도체를 비활성화시키고 전전두엽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는 제가 가장 많이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바로 '메모'입니다. 내가 불안함을 느끼는 이유를 종이에 적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들을 적는 것입니다. 가령 시험을 망칠까 봐 너무 불안한 상태라면 종이에 '나는 시험을 망칠까 봐 두렵다'라고 적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안을 적어보는 겁니다. 시험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들, 시험을 망쳤을 때 내가 겪게 될 최악의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방안들을 적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집중하기만 하면 됩니다. 만약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적기만 해도 십중팔구는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왜냐하면 적고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편도체가 비활성화되고 전전두엽이 활성화된 상태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걱정거리를 편도체가 활성화된 상태에서 바라보면 너무 불안하지만 전전두엽이 활성화된 상태에서 바라보면 별 것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불안이라는 감정은 피하면 점점 커지지만 정면으로 맞서면 오히려 작아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은 모든 상황에서 응용이 가능합니다. 적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생각으로 해도 됩니다. 인간관계, 생계유지, 시험, 취직, 건강 등 모든 상황에서 응용이 가능합니다. 즉 불안한 마음과 그 원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원인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분석하면 불안은 해소된다는 겁니다. 마치 인수분해처럼 말입니다. 인수분해를 할 때도 분해대상인 숫자가 아무리 큰 숫자여도 막상 분해해 보면 작아 보이듯이 불안도 그렇습니다.
아주 신기한 것은 불안은 분해하면 작아지지만 평안은 분해할수록 점점 커진다는 겁니다. 불안을 곱씹으면 점점 커지고 점점 불안해지지만 평안과 행복을 곱씹으면 점점 행복하고 평안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불안은 분해하고 평안은 곱씹어야 합니다. 당신은 지금 불안한 상태인가요? 아니면 평안한 상태인가요?
불안은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는 크게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체에 따라서는 자신과 타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건에 따라서는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시간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과거를 통제할 수 있나요? 바꿀 수 있나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미래는요? 아직 모릅니다. 물론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냐에 따라서 미래가 바뀐다고 옛날부터 학교 급훈으로도 많이 사용했지만 그것은 예상일 뿐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미래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현재는요?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불안을 정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알아야 합니다. 과거와 미래는 내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걱정하고 불안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현재는 지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적인 존재입니다. 그중에서도 바로 '지금'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바로 행동에 옮기면 됩니다. 과거와 미래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 아직 오지도 않았으며 없을 수도 있는 시간이니 머릿속에서 없애야 합니다. 어려울 수도 있으나 의식적으로 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났잖아? 내가 통제할 수 없어. 다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돼, 미래는 아직 몰라 그러니 지금 최선을 다하면 분명 좋은 미래가 올 거야'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면 처음에는 어려울 수 있고 잡념이 떠오를 수 있으나 결국(생각보다 금방 됩니다.)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다음은 주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내가 할 수 없는 일인가로 나누어봐야 합니다. 통제의 주체가 내가 아닌 타인에게 있는지 혹은 나에게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죠.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고백을 어떻게 할지, 언제 할지, 할지 말지에 대한 통제권은 나에게 있습니다. 고백한 다음은 그 고백을 받을지 말지에 대한 통제권은 타인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관계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은 얼른 내가 가진 통제권을 타인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책임을 전가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얼른 해버려야 불안이 해소된다는 것입니다. 사과를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얼른 사과하는 것이 맞고, 고백을 해야 한다면 얼른 고백을 해야 하며, 질책하거나 따질 일이 있으면 얼른 따져버리는 것이 불안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내가 가진 통제권을 지혜롭게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통제권이 타인에게 있는 일은 침해하지 않고 그냥 신경을 꺼버리면 됩니다. 침해하지 말라는 말은 통제권을 얼른 사용해라는 독촉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얼른 대답해라, 얼른 사과를 받아라, 얼른 사과해라 등으로 통제권을 사용할 것을 독촉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사건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을 놓고 생각해 보면 당연히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불안해하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불안이라는 감정은 99.9%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발생합니다. 그래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불안하기보다는 직접적으로 수습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수습을 할 때도 자신의 일과 타인의 일을 분리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걱정하는 원인,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 최악의 상황과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생각하고 분석하면 됩니다.
저는 줄곧 불안이라는 감정과 동행하며 살아왔습니다. 어릴 때는 가난으로 인한 불안, 운동선수생활을 하면서 성적에 대한 불안, 성인이 되어서는 진로에 대한 불안, 결혼을 앞두고는 가장으로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불안, 가정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말입니다. 돌아보면 불안해한다고 바뀔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안했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것은 불안했다는 사실보다는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간혹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는 불안하기보다는 가난을 동력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운동선수생활을 하면서는 운동을 더 열심히 할 수 있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일을 더 깊이 고민하고 여행도 다니고 독서도 많이 하고 다양한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었고, 결혼하고 난 후에는 지금 당장 가족을 더 사랑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면 분명 더 나은 삶을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불안에 정면으로 맞서서 싸우고 이겨내고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쾌락을 앞세워 뒤로 숨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주로 연애를 하면서 뒤로 숨었습니다. 사랑이라는 아주 고귀하고 위대한 변명뒤로 숨은 것이죠. 그렇지만 돌아보니 그건 굉장히 비겁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도 사랑을 할 수 있었고 그것을 잘 알면서도 사랑을 앞세워 숨은 것이죠.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결국 불안이라는 감정도 시간 속에 존재한단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처럼 불안도 그 시기를 지나면 결국 없어지기 마련이다. 시간이 흘러서 지난날을 돌아볼 때 불안했던 그 모든 순간을 추억할 것인가, 아니면 후회할 것인가는 오로지 그 시간 속에서 불안에 맞서 싸웠느냐, 피했느냐로 갈린단다. 져도 좋으니까 그 불안에 정면으로 맞서서 용감하게 싸웠으면 좋겠다. 지더라도 용감하게 싸웠다면 시간이 흘렀을 때 분명 좋은 추억이 되고 성장의 밑거름이 되니까. 하지만 피한다면 그 불안은 몇 배가 되고 훨씬 강해져서 네 앞에 다시 나타나게 되고 너는 그 불안을 훨씬 강한 상태로 다시 맞서야 한단다. 그때는 더욱 피하고 싶어지고 그렇게 피한다면 다시 더 강해져서 돌아오기 마련이다. 불안의 악순환이 되는 것이지. 작은 불안과 큰 불안은 없다. 아버지가 말하는 불안이 더 커지고 강해져서 온다는 것은 네가 그 불안을 마주하게 될 상황이 더 안 좋아진다는 뜻이란다. 학창 시절에 가지게 되는 불안감과 어른이 되어서 가지게 될 불안감, 부모가 되어서 가지게 될 불안감은 겉으로 보기에는 무게가 달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단다.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법이고 실제로 그러하니 말이다. 그래서 혹여나 부모인 내가 너의 걱정거리를 작게 여기고 무시를 했다면 진심으로 사과하마. 아버지에게도 불안이 있어서 너의 불안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을 뿐이지 무시할 의도는 아니란다.
불안하다면 그 불안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승패와 상관없이 용감하게 맞서야 한다. 그리고 맞서는 방법은 단 하나 '지금 이 순간'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란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네가 행복하고 성공하기보다는 불안하지 않고 평안하였으면 좋겠다. 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