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세요

by 루하은조안

연신 키보드를 두드리다 문득, 오직 내 분주함만이 우리 층을 채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 퇴근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보다 어제 이 일을 못 끝냈다는 조급함이 조금 더 크게 밀려왔다.


'오늘은 그만 가야겠다. 오늘 또 나와야 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는 엘레베이터가 너 때문에 퇴근을 못하지 않았냐며 타박을 한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다 잠에 빠졌을 아내 생각에 다시 마음이 급하다. 남기고 가는 일도, 쫓아가는 집도 나를 당긴다.


법인카드로 호출한 카카오 일반택시에 신형그랜저가 당첨되었다. 뻥 뚫린 올림픽대로를 타고 집까지는 20분 남짓. 한강에 온갖 생각을 쏟아내어 멀리, 황해로 보내는 시간이다. 기사님은 마침 불필요한 대화를 청하지 않으셨다.


본사 결산을 담당하는 재무회계를 30개월가량 했던 나는 작년 말부터 부가세 담당의 세무회계로 업무가 바뀌었다. 세법에는 아직 자신이 없고, 국세청을 상대할 배짱도 부족했던 탓에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목표로 작성했다. 부가세 잔고 점검을 통한 재무 건전성 제고. 작년 말을 기준으로 끝내 소명되지 못했던 1억 원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었다. 지난 10년의 기록을 거슬러가며.


잔고는, 복식부기로 작성되는 대차대조표는 그 주인의 민낯을 반드시 드러낸다. 소설 비명을 찾아서의 기노시다 히데요는 자신의 현주소를 대차대조표로 그려보며 스스로를 되짚고 또 평가한다. 자신의 욕망보다 더 크게 자리한 부채의 크기에 탄식하던 그를 보고 있자면 회계란 그저 경영의 수단이라기보다는 언어에 가깝다. 나와 내 우주를 이해하는 절묘한 언어.


10년의 부가세 기록. 농업적 근면성을 장점으로 가진 나는 지난 몇 달간 연어처럼 시간을 거스르고 있었다. 복잡하게 꼬인 기록들과 씨름하며 내 선배들의 실수와 나태를 메모해 나갔다. 나라도 했을법한 오해와 실수들이 존경하는 선배들을 괴롭힌 흔적들이다. 실수보다는 사실을, 나태보다는 구조적 한계를 표현할 방법을 고민하며 조금씩 나는 과거를 살폈다.


그러던 중 회사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터졌고, 내가 조심스레 진행하던 이 작업에 불씨가 튀었다. 하필이면 일련의 사건들이 내 잔고들과 맞닿아 있었다. 조심히 진행하려고 했는데, 재촉하는 사람들이 생겨버렸다.


어차피 어제는 끝내지 못했을 일. 자정이 넘도록 나를 붙잡은 건 난처함이었을까. 빠르게 드러내면 적나라해지고, 적나라한 문구는 사람을 다치게 한다. 점검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는데...재무건전성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전임자들의 민낯 아니다.


"여기신가요? 영수증 필요하세요?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건강하라는 기사님의 인사에 생각이 달아난다. 그래 건강해야지. 나도 나의 일도. 나의 집도, 나의 회사도. 기사님이 내게 어떤 깊은 뜻이 있어서 건넨 인삿말은 아닐 것이다. 그냥 일을 하고 계셨던 거겠지. 그냥 하는 것이다, 일이니까. 건강하기 위해서는 견뎌야 할 것이 분명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나는 이내 아내에게 향하는 엘레베이터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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