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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게 힘일까, 짐일까

몰라서 시작했고, 알아서 멈추었다

by 김승월
모르면 주저합니다.
알면 알수록 더 주저하게 됩니다.



책 속에 나를 가두다


내게도 한때는 야무진 꿈이 있었다. 라디오 PD로 전문가들이 알아주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 그래서 다짐했다. "알아야 면장도 하지. 제작 노하우부터 최대한 알아내자!" 실력 있는 PD가 되려면 제작 노하우부터 줄줄 꿰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지식과 정보를 긁어모았다.


나는 내가 예민한 방송 감각도,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부족한 걸 잘 안다. 그 빈자리를 노력과 지식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먼저 책부터 뒤졌다. 라디오 제작에 대한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해외 출장길에도 서점을 뒤졌고, 아마존 인터넷서점도 살폈고, 아는 사람들에게서도 얻어냈다.


PD들끼리는 서로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 작가나 진행자, 효과맨과 같은 스태프들에게 슬쩍 물어본 적도 있다. 자기 분야가 아니면 속 편히 일러준다. 마음 열고 도움 주는 분들은 심층 인터뷰 했다. 지식과 정보는 차곡차곡 그렇게 쌓여갔다.


그렇게 모은 지식과 경험을 엮어서 『라디오 다큐멘터리 만들기』를 펴냈다. 국내외 라디오 고수들의 제작 노하우를 집대성하겠다는 포부로 만든 책이다. 이름은 ‘다큐멘터리’지만, 사실은 라디오 제작 전반을 다루었다. 책이 출간되던 날, 손자병법을 뗀 장수처럼 으스댔다.

“이제 나도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겠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내 머리는 굳어버렸다. 늘 하던 프로그램에서 조차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건 안 돼.” ,“저건 하지 말랬지.” 지식들이 머릿속에서 나를 검열하고 있었다. 머리가 조여들었다. 내가 쳐놓은 그물에 내가 걸려든 기분이 들었다.


좌절한 의욕


그 무렵 내가 꽤 공들여 만든 프로그램이 있었다. 시각장애인 김광석 씨와 아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그 해보다 몇 년 전 국제피처회의에서, 같은 소재로 만들었던 프로그램 <찬울이의 크리스마스>가 꽤 좋은 반응을 얻었었다. 이번엔 더 길고 깊이 있게 다루어서, 내 자랑거리가 될 명품을 탄생시키려고 마음먹었다.


나의 그 열정을 알아본 기술팀은 영화 녹음실까지 잡아주었고, 섬세한 녹음으로 음질을 높였다. 회사에서도 밀어주어 완성된 작품을 국제 공모전에 내보냈다. 모든 게 기대 이상으로 흘러갔다.


결과는 참담했다. 몇 해 뒤에, 심사했던 오스트리아 라디오 PD를 만났을 때 들은 말이다.
“심사위원들이 전에 국제피처회의에서 발표했던 그 버전이 훨씬 좋았다고들 했어요.”


다시 들어봤다. 정성과 기술, 노력은 철철 넘쳤지만, 프로그램이 살아 있지 않았다. 크고 멀끔했지만, 생선가게 진열대에서 말라버린 물고기 꼴이었다.


알수록 망설이게 된다


지식은 힘이 아니라 족쇄가 되어 있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돼.' 팔팔 뛰는 것들이 하나하나 잘려나갔다. 싱싱한 것들로 채워야 하는데, 족쇄에 걸린 손은 움직이질 않았다.


그 심정을 BBC의 다큐멘터리 대가, 피어스 플로우라이트 (Piers Plowright) 에게 이메일로 털어놨다.
책을 쓰고 나니, 알면 알수록 주저하게 됩니다.”(The more I know, the more I hesitate.)

그는 그 말에 매우 공감한다며 답을 보냈다.
“좋은 표현이네요. 라디오제작 강의할 때, 꼭 인용하겠습니다.”

나 혼자 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망설임도 알아가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몰라서 해냈다


딸의 창업 과정을 보면 비슷한 생각이 든다. 딸은 전공과 무관한 저시력 보조기 사업에 뛰어들었다. 엄마가 해준 말, "친구모임에서 한 친구가 은으로 만든 확대경을 자랑하더라."를 듣고 영감을 받았단다. 고령화 시대를 내다본 딸은 ‘지니고 싶은 멋진 확대경, 당당하게 꺼내 쓸 수 있는 아름다운 확대경’을 만들어보겠다며 창업했다.


광학도, 제조도, 무역도, 마케팅도 모르는 채, 겁도 없이 차렸다. 몰랐던 게 오히려 힘이 되었나 보다. 18 년이 지난 지금, 딸은 이렇게 말한다.
“그때 몰랐으니까 시작했지, 알았으면 절대 못 했을 거예요.”


모르고 덤볐다가 망하는 사람도 있지만, 너무 많이 알아서 한 발도 떼지 못하는 사람도 꽤 된다. 모를 때는 아는 게 힘이라고 믿었는데, 알면 알수록 아는 게 짐이 되기도 한다.


앎의 끝


책을 펴내고 몇 년은 내가 쓴 책에 갇혀 지냈다. 새로운 프로그램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머릿속 지식이 조금씩 내 것이 되었다. 체화된 지식이 내 편이 되자 날개가 되어 주었다. 덕분에 내 대표작으로 내세울 만한 프로그램이 태어났다.


책은 나를 가두었지만, 세월은 그 문을 열었다. 알면 알수록 주저했지만, 그 주저함도 나를 키웠다.


조금 알면 짐이 되고,

많이 알면 날개가 되는 걸까.

앎의 끝은 어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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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병상에 누우니 보이네- 지나가고 나니 보이는 것들》,

다음은 이삿짐에 대한 색다른 생각, "비우고 나니, 내가 보이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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