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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아 더 빛나는 사람들

이름 없는 헌신이 세상을 밝힌다

by 김승월
무대 뒤에서 묵묵히 떠받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름 없는 헌신이 세상을 밝힙니다.



무대 뒤의 작은 불씨


무대가 빛나는 건 무대를 비추는 빛 때문이다. 빛나는 성취는 어떻게 빛날까? 무엇이 비춰줄까?


1989년, 가수 변진섭의 ‘희망사항’이 대히트했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김치볶음밥을 잘 만드는 여자…”

발표했던 당시로는 가사도 형식도 파격적이었다.


이 곡을 작사, 작곡한 이는 대학생 노영심이다. 그는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아르바이트를 잠시 했다. 라디오국 사무실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청취자 엽서를 고르고 정리하는 일이다. 나는 그에게서 단순한 손길 이상의 것을 보았다. 아이디어를 내놓을 때마다 귀담아들었다.


그 무렵, 중고등학교 여학생들 사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고 그가 귀띔해 주었다.

덕분에 방송에서 소개되지 않았던 무명그룹을 별밤 공개방송에 초대했다. 그들이 무대에 오르자 방청객들은 환호성을 내질렀고, 춤추며 노래하자 정동 라디오극장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어졌다. 여학생들의 환호가 너무 커서 녹음을 잠시 중단했을 정도였다. 아르바이트생의 한마디가 새로운 스타 탄생의 문을 열었다. 누구의 목소리든 존중해야만 길이 열린다는 걸 절감한 순간이었다.


그날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전화 노래자랑 해요. 제가 키보드로 반주할게요.”
피아노 전공이니 실력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대학생이 직접 반주하고, 청소년들이 그 반주에 맞춰 노래한다면 신선하고 재밌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옆에 있던 DJ 이문세 씨가 웃으며 거들었다.
“그거 ‘별밤 뽐내기 대회’네요.”
청소년티가 나고 우리말 이름이니 코너명으로 그만이다. 수많은 인기 가수를 배출한 별밤의 대표 코너 '별밤 뽐내기 대회'가 그렇게 태어났다.


아이디어는 직급이나 경력에 따라 나오는 게 아니다. 누구의 말이든 존중하고 귀 기울이면 나온다.


무대를 떠받친 이름 없는 손길


다른 무대에서 또 한 사람의 다른 불씨를 만났다.


1989년과 1991년, 내가 별밤 PD였을 때는 행사를 자주 벌였다. 용인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으로 인기 가수들과 함께 팀을 짜서 버스 타고 소풍도 갔다. 여름방학엔 2박 3일 캠핑도 떠났다. 수백 명의 청소년들을 이끌고 움직이다 보니 손이 많이 딸렸다. 그럴 때마다 방송사에 드나드는 매니저나 기획사 직원들이 도와주기도 했다. 공연장에서 관객을 다뤄봐서, 행사의 흐름을 척척 짚어냈다.


봉사자 중에 기억에 남는 젊은이가 있었다. 체구는 아담했지만 판단이 정확하고 빨랐다. 이상한 사람이 접근하면 무섭게 막아섰고, 위험 기운이 스미면 재빨리 움직여 상황을 정리했다. 꼭 필요한 순간, 꼭 필요한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도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맡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어느 자리에 있든지 빛을 밝힌다. 그가 훗날 장윤정이 부른 인기가요 ‘어머나’를 작사, 작곡한 윤명선 씨다. 윤명선 씨는 좋은 곡도 많이 썼고,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장으로 조직 혁신에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그 당시 무대 뒤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던 그의 모습이 이미 그 미래를 말해 주고 있었던 셈이다.


존경을 부르는 태도


지금 이야기와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대학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강의실 한쪽이 심하게 더러워져, 청소하는 분이 수업 중에 들어와 치웠다. 교수님은 수업을 멈추고 청소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청소부가 나가자 한 말씀했다.
“힘든 일을 불쌍하게 하면 동정을 받고, 씩씩하게 하면 존경을 받습니다."


청소부는 연세 있는 남성이었는데 몹시 지친 모습이었다. 안쓰럽게 보였다. 개인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그런 모습으로 씩씩하게 청소했더라면, 존경심으로 지켜보지 않았을까. 그 순간 깨달았다. 작은 일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눈부시지 않아 더 빛나는 빛


세상에는 사소한 일은 있어도, 하찮은 일은 없다. 무대를 비추는 건 조명이지만, 무대를 떠받치는 건 이름 없는 손길들. 보이지 않아 더 빛나는 사람들이다.


숨어하는 헌신은 눈부시지 않다.

눈부시지 않아 더 빛난다.

이름 없는 손길이 세상을 밝힌다.


romain-grossier-DSeVfl4CnZg-unsplash.jpg Romain GROSSIER on Unsplash


브런치북《병상에 누우니 보이네- 지나가고 나니 보이는 것들》,

다음은 지식이 꼭 필요한지 살피는, '아는 게 힘일까, 짐일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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