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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이룬 성취는 없다

성취는 우리의 다른 이름

by 김승월
빛나는 순간 뒤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성취의 그림자에 가려진 이들은 누굴까.



성취 뒤의 그림자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남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요.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없었어요.”

연극배우 신구(89) 씨가 31개 도시에서 600일간 139회 공연한 '고도를 기다리며'의 마지막 무대를 마치고 남긴 말이다.


그는 2023년, 급성 심부전증으로 심장 박동기를 달고도 무대에 올랐다. 2022년엔 라스트 세션 공연 뒤 응급실로 실려 간 적도 있다. 의사는 “폐에 물이 80%나 찼다. 무대에 오르면 죽을 수도 있다”라고 경고했지만, 그는 “내가 책임진다”며 무대에 섰다. (윗글, 조선일보 2025.8.12, 이대훈 기자)

열정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성취였지만, 그 공을 끝내 남에게 돌렸다.


그의 말이 내게 오래 남았다. 나 또한 함께 일한 사람들 덕분에 이룬 일이 많았으니까.


사라진 이름들


MBC 라디오에서 <한국민요대전>을 만들었다. 전국의 사라져 가는 민요를 찾아내어 녹음해서 프로그램, CD, 악보집으로 만든 사업이다. 이 사업은 1995년 한국방송대상에서 TV, 라디오 통틀어 최고상인 ‘대상’을 받았다. 라디오 부문에서 나온 최초의 대상이다. 전무후무한 쾌거였다.


한국방송대상에서 대상 수상자가 보도되었을 때다. 한국민요대전 PD들은 들떴다가, 메인 PD 한 사람에게만 상이 주어진다는 말에 당혹스러워했다. 물론 그 PD가 주도적으로 추진했고 다른 PD보다 훨씬 많은 일을 했다. 그래도 수상자로 팀원들의 이름이 없다는 게 의아했다. 지금도 한국민요대전을 바탕으로 만든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홈페이지에는 민요채록에 그 한 사람 PD 이름만 올라가 있다.


이 사업의 아이디어를 낸 선배 PD가 따로 있었고, PD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대규모의 프로젝트였다. 경기도를 담당한 PD, 강원도를 담당한 PD처럼 지역 별로 담당 PD가 있었다. 나만해도, 경상북도 25개 시, 군 지역을 맡아서 3년 동안 민요를 채록하러 다녔다.



이 사업은 1989년부터 1995년까지 전국에서 1만 8천여 곡의 토속민요를 녹음했다. 그중에서 2,255곡을 골라 103장의 CD와 악보집에 담아냈다. 그 값진 자료들은 전국 도서관, 대학, 문화 관련 단체, 국내외 연구기관에 보내졌다. 국악은 물론 민속학, 국문학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평가도 들었다.


어느 인류학 교수가 삼국유사에 빗대 MBC의 한국민요대전을 추켜주었다.

"전국의 설화를 모은 삼국유사처럼, 한국민요대전도 세월이 갈수록 빛날 문화유산입니다"

시상대에 오르지 못했던 어느 한국민요대전 PD가 그 말을 듣고 한 말했다.

"삼국유사도 '일연' 혼자 쓴 건 아닐 거야. 우리처럼 여러 사람이 함께 했겠지.”

새겨진 한 사람의 이름 뒤에는 지워진 많은 이름들이 있지 않을까.


빛의 이면, 그림자의 힘


나는 라디오프로그램으로 분에 넘치게 국내, 외 여러 상을 받았다. 특히 국제상을 수상하면 신문, 잡지에서 다루어지고 인터뷰도 하게 되는데, PD인 나만 수상자로 쓰였다. 프로그램은 PD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다. 뛰어난 작가가 구성해 주고, 유능한 스태프들이 음악, 효과, 녹음을 담당해 주고, 재능 있는 출연자들이 소리를 내준다. 그럼에도 수상자 이름에는 오직 PD 한 명뿐이다. 그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빛이 강해지면 그림자는 짙어지지만, 그 그림자가 있기에 빛은 제 모습을 완성한다. 돌이켜보니, 나 역시 그림자였기도 했지만, 때로는 빛이었다. 그림자가 있어서 빛이 빛났다.


성취의 진짜 얼굴


역사적으로 훌륭한 일을 해낸 분들의 업적도 그렇지 않을까? 어느 누가 자기 혼자 힘 만으로 발명했고, 혼자 몸만으로 최고봉을 정복했을까? 한 사람의 이름이 부각되지만, 그 뒤에는 수많은 손과 머리가 깔려 있다.


물론, 하지도 않은 일에 숟가락 얹듯 이름만 올리는 경우도 있지만, 이름 없이 헌신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역사의 행간을 읽고, 기록 너머를 상상해야 진짜 얼굴이 보인다.


성취는 우리의 다른 이름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누구나 공동체 속에서 자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족의 보살핌을 받고, 사회 속에서 돌봄을 받으며 살아간다. 우리 생존의 바탕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손길과 희생이 깔려 있다. 어느 누구의 성취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혼자 이룬 건 하나도 없다. 가족의 믿음, 동료의 손길, 스승의 조언 모두가 어깨를 밀어주었다.


나의 성취는 나 혼자 이룬 것이 아니다.

얽히고설킨 인연과 도움 속에서,

우리의 힘이 모여 나를 통해 드러난 것일 뿐.

성취는 우리의 다른 이름이다.


lars-schneider-p64XzA5AZg0-unsplash.jpg Lars Schneider on Unsplash


브런치북 《병상에 누우니 보이네- 지나가고 나니 보이는 것들》,

다음 화에서는 무대 뒤의 인물들 이야기, '보이지 않지만 빛나는 것들'이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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