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건 무심한 침묵
가르쳐주지 않고 내버려 두어 길을 찾았습니다.
실수 속에서 길이 보였습니다.
나의 첫 선임 PD는 차가운 분이었다. 라디오 PD는 흔히 선배와 후배가 짝을 이룬다. 사수(射手)와 조수(助手)처럼 붙어 다니며 일을 가르치고 배우는데, 업계에서는 이걸 ‘도제 시스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배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익히는 방식이디. 나 같은 새내기 PD는 당연히 선배 옆에서 하나하나 배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부서 배치받고 처음 인사하던 날, 구석진 자리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선임은 주제 하나를 툭 던졌다.
“글 하나 써봐.”
방송 원고 쓰는 법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짐작해서 써 내려갔다. 선임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때에야 겨우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배우고 싶어서 이것저것 물었디. 그럴 때마다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만 봤다. “어느 책 보면 좋을까요?” 그래도, 그 특유의 어정쩡한 표정. 가까이 가기 힘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선배는 일일이 챙겨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처음엔 서운 했지만, 받아들였다. 답을 주지 않았기에, 나는 길을 찾아야만 했다.
수습 6개월이 끝나자마자, 나에게 프로그램이 하나 떨어졌다. 그 선임 PD와 함께 맡은 ‘한국기행, 고향의 소리’.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담는 일종의 라디오 다큐멘터리다. 선배는 딱 한마디 던졌다.
“가고 싶은 데 가 봐.”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마음대로 골라서, 방송국 예산으로 여행 갈 수 있다니! 그래서 정했다. 강원도 정선군. 당시만 해도 오지 중의 오지로 꼽히던 곳이었다.
가을빛이 물든 정선의 산촌은 고향 같았다. 사람들이 순박해서 마음이 여러 번이나 찡했다. 취재를 마치면 새로 산 카메라에 가을 풍광을 담아내며 복에 겨워했다. 문제는 돌아와서 원고를 써야 한다는 현실. 이런 다큐 프로그램은 경력 많은 PD들이 맡는다. 수습딱지가 막 떨어진 초짜가 혼자 하긴 너무 버겁다. 섭외부터 취재, 녹음, 편집, 구성, 연출까지 다해야 한다. 게다가 장명호 부장은 "PD는 글도 쓸 줄 알아야 한다"며 작가 도움을 막았다.
첫 원고를 며칠 밤 끙끙 앓으며 고쳐 쓰고 또 고쳐서 선배에게 보였다. 그는 피식 웃더니 원고를 도로 내 앞으로 밀어 넣었다. 말 한마디 없었다. 어깨가 축 처저서 장 부장에게 보여드렸다. 내 표정이 안쓰러웠는지 다독여 주었다.
“음악이랑 효과음 넣으면 괜찮게 들릴 거야.”
기가 죽은 채 스튜디오로 올라갔다. 엔지니어, 음악, 효과, 성우, 당대 최고 스태프들 앞에 원고를 내밀고, ‘큐’를 줬다. 이럴 수가 있을까. 내가 쓴 어색한 문장들이, 유강진 성우의 소리로 날개를 달았다. 서툰 표현도 비문도 그의 노련한 연기 앞에선 그럴듯해졌다. 음악은 감정을 살렸고, 효과음은 현장을 만들었다. 전설의 엔지니어 윤상도는 나의 ‘큐’ 없이 정확하게 타이밍을 잡아냈다. 결국,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시스템이 만들었다.
그 후로도 매번 벽 앞에 섰다. 길을 찾지 못해 선배 PD들의 방송을 뒤졌다. 마치 초보 작가가 명문을 베껴 쓰듯, 장명호, 고장석 PD의 '한국기행, 고향의 소리'를 귀로 베꼈다. 자료실에서 그분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찾아내어, 틈 나는 대로 몽땅 들었다. 처음엔 그저 흉내 내기 바빴다. 점점 내 목소리를 찾았다. 새로운 표현을 시도했으며, 신기술을 익혔고, 색다른 소재에 목말라했다. 그렇게 니는 실수 속에서 조금씩 커갔다.
나더러 '상복 많은 PD'라고 하는 말도 들었다. 아시아태평양 방송연맹 Asia-Pacific Broadcasting Union의 ABU상에서 라디오 대상 3회, 특별상 2회를 비롯해서 국내외 방송상을 여러 차례 받았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행운의 시작은 내버려 둔 선임 PD 덕분이었다. 나를 내버려 두었기에, 나는 스스로 길을 찾았다.
영국의 억만장자 리처드 브랜슨 Richard Branson 은 자서전 『Losing My Virginity』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아버지가 나를 실수를 통해 배우도록 내버려 두어서 감사드린다.”
방송이란 누군가가 모든 것을 가르쳐 주기엔 너무 긴 여정이다. 넘어지고 깨지며 배우는 수밖에 없다.
그 선배는 내게 무심했다. 차가운 눈빛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한 때는 그 침묵에 막막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가르침이란 꼭 친절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때로는 차가움이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그 선배가 내버려 둔 건 나의 실수가 아니라, 나의 가능성이었는지도 모른다.
늦었지만, 이제야 말한다.
"그때, 실수하게 내버려 두어 고맙습니다."
그 침묵이
내 방송인생의 첫 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