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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전기밥솥의 화려한 재취업

버려진 것들의 부활

by 김승월
버려진 밥솥은 어떤 새 삶을 보여줄까.



밥솥이냐? 택시 문이냐?


방송사 라디오드라마 스튜디오 구석에는 고장 난 전기밥솥이 놓여 있다. 밥 지으려고 가져다 둔 건 물론 아니다. 솥뚜껑을 거칠게 눌러 닫으면 ‘퍽’하고 택시문 닫는 소리가 난다.


바닥 한편에는 낡은 릴테이프가 구겨져 펼쳐 있다. 효과맨이 그 위를 밟으면, 낙엽처럼 '사각' 소리를 낸다. 전기밥솥도, 릴테이프도, 이제는 소리 내는 효과도구가 되었다. 누군가에겐 쓸모없어진 폐기물이지만, 효과맨 손에서 인생 2막을 열었다.


교단에서 스튜디오로, 다시 강단으로


내 인생도 그랬다. 분필 잡던 손으로 마이크를 잡았고, 대본 쓰던 손으로 다시 강의안을 펼쳤다. 라디오 PD로 한 세월 일했지만, 그전엔 초등학교 교사였다. 가르치는 버릇은 방송할 때도 스며들었다. 청취자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고 싶었고, 그래서 늘 "재밌으면서도 배우는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했다.


90년대 초,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PD 할 때였다. 별밤('별이 빛나는 밤에'의 애칭)은 당시 인기 최고의 청소년 프로그램이었다. 청소년의 문학 감수성을 일깨워주려고 ‘별밤 백일장’을 열었고, 가족과 소통하도록 ‘별밤 사서함’을 차렸다. 만화가가 세계 여러 나라를 소개하는 코너도 마련했다. 진행자 이문세 씨는 딱딱한 주제도 재치 있게 풀어내는 데는 달인이었다. 덕분에 내 교육 본능도 자연스레 빛났다.


대학에서 강의했을 때는 방송 프로그램 구성하듯 강의안을 짰다. 첫인사도 프로그램 오프닝 멘트처럼 준비했고, 중간엔 지루할 틈이 없게 방송 일화를 들려주거나 영상도 틀었다. "행운은 잔인하게 찾아온다.", "사는 게 폭력이다", 이런 도발적인 말로 학생들의 귀를 쫑긋 세웠다. 조별 과제는 방송프로그램 형식으로 발표하게 했다. 과제발표와 방송은 '전달' 하는 면에서는 닮아서다. 그래서일까. 12년 넘게 시간강사, 겸임교수로 강단에 섰다.


국제행사도 방송처럼


방송을 은퇴하고는 바티칸 공인 가톨릭 커뮤니케이션 단체 ‘시그니스 SIGNIS’에서 봉사했다. 9년 동안 시그니스아시아 이사였고, 2022년 세계총회 (SIGNIS World Congress 2022)가 서울에서 열렸을 땐, 한승수 전 국무총리를 조직위원장으로 모시고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2022 시그니스세계총회

국제행사 준비할 때도 나는 여전히 PD였다. 무대는 달랐지만 원리는 같았다. 그 행사를 방송처럼 기획하고, 방송 콘텐츠처럼 프로그램 짜고, 이벤트 연출하듯 꾸몄다. 행사는 한 편의 생방송이었다. 무대가 바뀌어도 같은 일을 했다.


버려진 경험도 언젠가 빛난다


과거의 경험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빛나기도 한다.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인생의 모든 경험이 점처럼 연결되어 언젠가 하나의 길을 만든다'라는 믿음을 강조했다. 디자인 명문대를 다니다 중퇴한 그는 청강생으로 '서체 디자인 수업'을 들었다. 그게 훗날 매킨토시 컴퓨터의 서체 디자인 혁신으로 이어졌다. 서체 디자인 수업이 ‘세계적 그래픽 혁신’의 시작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사랑으로 보면, 우주엔 쓸모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김지영 사무엘 신부로부터 들은 어느 신학자의 말이다. 쓸모없어 보여도, 때가 오면 반드시 쓰인다. 밥은 못 짓지만, '퍽'소리 하나 끝내주는 전기밥솥처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나이에, 이 기술로 뭘 하겠어?"

살다 보면 가진 능력이 쓸모없어 보일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스튜디오 구석 전기밥솥을 떠올리면 어떨까. 밥솥 뚜껑이 닫힐 때마다 '퍽'하는 그 소리가 말해준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은 나의 소중한 경험들이 쌓아 올린 탑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단 하나도 없다.


스튜디오 구석 전기밥솥은 오늘도 '퍽'소리 낸다.

세월이 흘러도 소리는 살아남는 법.

그 소리에 오늘도 나를 일으켜 세운다


Europeana on Unsplash


브런치북 《병상에 누우니 보이네- 지나가고 나니 보이는 것들》,

다음은 이상한 감사지요. '실수하게 내버려 두어 고맙습니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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