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움이 향기처럼 스며들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나는 무슨 말을 할까.
그가 남긴 한마디가 종소리처럼 울렸다.
마지막 순간에 들은 한마디가 있다. 종소리처럼 길게 울려 퍼진 그 한마디. 오랜 세월 병원에 드나들다가, 지금은 병상에 있는 고등학교 친구 박영진이 한 말이다. 이틀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나에게 그가 전화했다. 그가 들려주었던 마지막 그 말이 사라지지 않는다.
말재주가 남달라 만날 때마다 나를 배꼽 잡고 웃게 했던 그다. 라디오 PD 시절, 그의 말재주를 믿고 프로그램에 출연시킨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말에 남이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흐뭇해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를 웃겼다. 당뇨 합병증으로 발가락을 절단한 일을 남의 이야기처럼 익살스럽게 풀어냈다. 웃음 속에 담긴 담담함이 내 마음을 아리게 했다.
다음 날도 전화가 왔다. 연이틀 전화해 주어 고맙다고 하자 그는 멋쩍게 웃었다.
"우리 동창 최세균이는 매일매일 나한테 전화해."
세균이를 오래 알았지만 그런 면이 있는지는 미처 몰랐다. 나는 아주 가까운 친구가 아팠을 때 일주일에 한 번 전화 건 게 고작이었다. 매일이라니, 그가 다시 보였다.
영진이는 힘든 병세를 숨기면서도 가능한 밝게 말하고, 언제나 “고마워”라는 말로 끝인사 했다. 42일 입원해 있는 동안 그의 전화는 내게 숨통이자 오아시스였다. 입원 환자에게 전화 한 통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배웠다.
내가 퇴원한 뒤에도 우리는 가끔 통화했다. 병세가 나빠져서 그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다. 며칠 뒤, 걸려온 전화의 발신자는 그의 아내였다. 남편이 신장투석을 중단했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어 한단다. 고등학교 친구로는 최세균과 나, 두 사람에게만 부탁했다고 한다.
수화기 너머 힘겨운 숨소리가 들렸다. 그가 자주 하던 농담, "나는 불사조잖아"가 떠올랐다.
“힘내, 너는 불사조잖아.”
기운 없는 소리로 그가 답했다.
“아니야, 나 이제 그만 종 쳐야 할 것 같아.”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남다른 언어 감각을 잃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그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에 들은 그의 말, “고마워”만이 내 가슴에 남았다.
며칠 뒤, 세균이가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아내의 간곡한 설득으로 영진이가 다시 투석을 받기 시작했고, 몸이 조금 회복되었단다. 세균이와 나는 그의 아내 정성이 영진이를 살렸다고 입을 모았다.
보름쯤 지나서였다. 전화를 거니, 그의 아내가 받았다. 영진이가 음식을 먹지 못해 콧줄로 영양을 공급받고 있다며 전화를 바꿔주었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 스마트폰에 귀를 바짝 댔다. 불길했다. 누군가 내게 해주어서 울컥했던 말을 그대로 그에게 건넸다.
“버텨줘서 고마워.”
그는 힘겨운 목소리로 답했다.
“고마워.”
이틀 뒤, 그의 아내로부터 부고를 받았다. 아직 외출을 자제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틀거리는 몸을 등산 스틱에 의지해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그의 아내는 마음 깊이 고마워했다. 아들에게 최세균과 내가 남편과 주고받은 통화 이야기를 세세히 들려주었단다. 내가 이틀 전 나눈 통화가 그의 생애 마지막 대화였다고도 했다. 전화받은 그날 그는 의식을 잃었고,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조문을 마치고 돌아서는 길에, 그의 아내는 거듭 감사 인사했다. 나는 그저 그가 내게 해준 대로 따라 했을 뿐이다. 감사는 오히려 내가 할 일이다. 그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 '고마워' 그 말이 지금도 내 귓가에서 살아 숨 쉰다. 고마움이 향기처럼 스며들었다.
어려움에 빠진 친구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내가 비슷한 처지에 놓여 봐야 비로소 알게 된다. 입원한 환자에게 어떻게 해주면 좋을지도 입원하게 되면 저절로 알 게 된다. 아프거나 힘들 때면, 누군가의 따뜻한 말이나 마음씀으로 힘움 받는다. 그것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다른 환자에게 그대로 해주면 된다. 성경 말씀 그대로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그 많은 말들은 바람처럼 흩어졌지만,
'고마워' 한마디는 내 안에서 꽃으로 피어났다.
바람이 불 때마다
향기를 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