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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입 닥치고 사세요

나이 들수록, 말보다 숨이 길어진다

by 김승월
나이 때문일까
내 감정은 왜 이리 자주 흔들릴까.
삐치고 울컥하는 나를 어떻게 할까?


친구의 농담에서 내 마음을 보다


“몸은 아직 멀쩡한데... 요즘 내가 자주 삐져.”

건강이 어떠냐는 내 물음에 친구가 웃으며 그리 답한다. 나도 피식 웃었지만, 그 말이 남 일처럼 들리지 않는다.


42일 입원 끝에 퇴원해 지인들과 안부 전화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누구는 어디가 안 좋고, 누구는 병원 들락날락한다더라는 걱정을 나누다가 “너는 건강하냐?”라고 묻자, 친구가 그리 답했다. 같이 웃었지만, 그 말이 내 속을 콕 찔렀다. 나도 그런 적이 있어서다. 이 웃픈 현상의 이유는 뭘까?


나이 들어 흔들리는 마음


예전엔 후배들이 종종 그랬다.
“우리 선배님, 나이 들더니 괜히 노여움을 잘 타셔.”
그럴 때마다 속으로 흉봤다.

‘나이 드셨으면 더 너그러워져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이 조금씩 이해된다.


요즘 들어 별일 아닌 것에도 속 상할 때가 있다. 누가 내 말에 토를 달거나, 마음에 들지 않게 말하면, ‘내가 나이 들어서 우습게 보이나?’ 한마디 툭 내뱉고는 스스로 놀란다. 예민해진 걸까? 옹졸해진 건 아닐까?


눈물이 자꾸 고이는 이유


입원 한지 얼마 안 돼 서다. 외상성 뇌출혈 진단을 받고 병상에 누워 있던 어느 날이었다. 밥을 먹는데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이 불쑥불쑥 밀려왔다. 이유 없이 눈물이 고였다.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더니, 주치의가 설명해 주었다.

“감정을 조절하는 뇌 부위가 손상되어서 그런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놓였지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슬픈 감정이 단지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보다. 다치거나 나이가 들면 몸뿐 아니라 감정도 영향을 받는듯하다. 그러니까, 울컥하는 마음, 예민해진 감정, 그 모든 게 몸의 언어 아닐까.


호르몬이 바꿔놓은 감정의 얼굴


내가 50대였던 어느 날이었다. 라디오 건강 프로그램을 만들 때다. 당시 중앙대병원 비뇨기과 김세철 교수를 초대해서 ‘중년 남성의 여성화, 중년 여성의 남성화’에 대해 방송했다. 교수님 설명이다.

“남성은 나이 들면 성 호르몬 분비가 줄어들면서 여성성이 강해질 수 있고, 여성은 반대로 남성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방송이 끝난 뒤 스튜디오 밖에서 교수님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요즘 제가 집안 살림 도구의 먼지며 때가 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전혀 안 보였어요, ‘아, 내가 나이 들어서 현명해졌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여성성이 생긴 거군요?”

교수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또 물었다.
“그럼 저, 남성 호르몬 주사 맞아야 하는 건가요?”

교수님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냥, 입 닫치고 사세요.”


침묵이 나를 지켜준다


감정은 내가 조종한다고 해서 조절되는 건 아니다. 상황에 따라, 환경에 따라, 심지어 몸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요즘은 괜히 화가 나거나 서운할 때면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것도 노화의 한 증상인가?”


나이 들어 감정이 예민해지는 건, 어쩌면 더 깊어진 마음 때문일지 모른다. 나이 들수록 말보다 숨이 깊어진다. 괜히 울컥해도, 삐쳐도 괜찮다. 웃으며 흘려보낼 수만 있다면 된다. 그냥 입 다물고 살 수도 있다.


침묵이 나를 지켜준다.

말은 화살이고,

침묵은 방패니까.


Junior REIS on Unsplash


브런치북 《병상에 누우니 보이네- 지나가고 나니 보이는 것들》,

다음은 '고마워, 그 한마디가 남았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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