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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마지막 통화처럼

목소리에는 마음이 산다

by 김승월
마지막일지 모르는 전화가 남긴 울림이 있습니다.
소중한 인연은 말 한마디로도 살아남습니다.



목소리에 스민 그림자


마지막 전화라면, 어떤 말을 먼저 꺼낼까? 무슨 말을 꼭 해야 할까?


형 전화를 받은 건 2022년 2월, 어느 퇴근길 저녁이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막 들어서려던 참에 전화가 울렸다. 급히 차를 세우고 전화를 받았다. 형은 혹시나 잘못 듣고 놀랄까 봐,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차분하게 이어갔다.

“네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나 병에 걸렸거든. 병원에서 ‘골수이형성증후군’이라고 진단했어.”


처음 듣는 병명이었다. 낯선 단어가 차 안의 공기를 멈춰 세웠다.

“형, 그 병이 어떤 건데요?”


형은 담담하게 진단 과정을 들려주었다. 그 말끝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침묵 속으로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 통화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만 같았다.


말없이도 이어지던 마음


형과는 두 살 터울이다. 말수가 적은 우리 형제는 살갑게 통화하거나, 재잘대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는 달라졌다. 형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어, 전보다 더 귀를 기울였다. 형도 그날부터 이 말 저 말 세세히 들려주기 시작했다.


형이 입원한 뒤 나는 매일 저녁 퇴근 후 전화를 걸었다. 내가 놓친 날엔 형이 먼저 전화 주었다. 형은 늘 같은 톤으로 증세를 알려주었고, 인터넷에서 본 정보와 자신의 상태를 비교해 설명했다. 말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고 듣다가도, 내가 바쁠 땐 “형, 내일 전화할게.” 하고는 슬쩍 마무리지었다. 그럴 때면 형 목소리에 외로움이 묻어났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해였다. 형은 예방에 누구보다 철저했다. 귀여운 손주들마저 형 집에 얼씬 못하게 막았다. 여동생과 나는 백신 접종과 코로나 검사하고 나서 겨우 한 차례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형은 감염되고 말았다. 그것도 입원 중인 병원에서 감염되다니 기가 막혔다. 가족들은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형 병세는 순식간에 악화됐다. 폐렴까지 겹쳤고, 약마저 듣지 않았다. 그제야 형 목소리에 울음이 배었다.

“요즘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 돌아가실 때 얼마나 힘드셨을까. 피 뽑을 때마다 그 생각이 나더라.
얼마나 아프셨을까."

효자였던 형은 자신의 고통 속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병상에 누워서야 그 마음, 나도 알게 되었다.


병상에서 다시 들려온 목소리


2025년 3월 21일, 나는 사우회보 취재 중 낙상 사고로 외상성 뇌출혈로 입원했다. 손가락을 찌르는 혈당검사, 혈액검사를 받을 때마다 형이 한 말이 떠올랐다. 병상의 고통, 외로움, 죽음의 그림자를 혼자 맞닥뜨려야 하는 그 중압감이 선명하게 와닿았다.


2023년 1월, 임종 전 마지막 면회가 허락되었다. 형은 이미 의식이 흐릿해 아무 말조차 나눌 수 없었다. 그제야 형과 전화했던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달았다.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꿋꿋하게 살아온 형. 그 바쁜 틈틈이 이웃과 마을을 위해 헌신했던 형.

"나, 형 무척 자랑스러워했어."

그 말도 못 했는데 형과의 전화는 불통이 되어 버렸다.


놓치고 나서야 보이는 말들


그때는 왜 몰랐을까. 함께 자라며 나눈 말들이 되살아났다. 소소한 재잘거림도, 어깨 펴고 힘주어하던 말도, 핏대 세우며 토하던 울분도, 다 소중한 마음의 흔적이었다.

“형, 나 형 좋아해요.”

그 말 한마디 더하지 못한 게 두고두고 한스럽다.


입원한 지 3주가 되었다. 이번 병치레로 바뀐 게 있다면 내가 먼저 전화를 건다는 거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아내나 친구와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는다.

“잘 잤어?”

“밥은 먹었어?”
사소한 대화지만, 전화할 수 있는 가족과 친구가 있다는 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내 친구도 아프다. 제주도에 사는 50년 지기, 알로이셔 이상천. 내가 입원했다는 소식 듣자마자 제주도에서 날아왔다. 의식이 없던 나를 보지도 못하고 딸아이 옆에서 마음만 졸이다 제주로 돌아갔다. 다시 올라와 병원 로비까지 왔다는 전화를 주었다. 면회는 금지라서 결국 못 만나고 제주로 도로 내려갔다.


그 친구에게 나는 루르드 성모님 상을 선물했다. 불교신자인 분이 병상에 있는 내게 보내준 성모님 상과 똑같은 것이다. 친구는 그 상을 여의도성모병원 2층 성모님 상 위에 올려두고 사진을 찍어 문자랑 보내왔다.

"숨은 그림 찾기처럼 루르드 성모님 찾아봐."

귀여운 내 친구!



그날 밤, 친구는 숙소 근처 성당에 들렀다가 우연히 신부님을 만나, 루르드성모님 상에 축성을 받았단다. 그는 그 일을 ‘기적’이라고 불렀다. 설명할 수 없는 평온함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는 내게 신앙의 길을 열어준 친구이고, 지금도 내 영혼을 일깨워주는 벗이다.


알로이셔 이상천과 신부님


끊어도 끊어지지 않는 실


형에게 못다 한 전화, 이젠 그 친구에게 건다. 이 세상 마지막 통화가 아니길 바라며 오늘도 목소리를 남긴다.


우리 대화는 실이다.

끊어도 끊어지지 않고,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진다.

그 실은 내 마음을 감아주어,

풀어도 풀리지 않는 인연이 된다.




브런치북 《병상에 누우니 보이네- 지나가고 나니 보이는 것들》,

다음은 <죽을 뻔하니 버킷리스트가 사라졌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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