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피어난 꽃
꽃보다 귀한 건, 내 곁의 목소리였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너무 의지하지 마세요.”
집에서 하던 대로 할까 봐 신경 쓰였을까. 간병인이 배정되자 아내가 전화로 한 말이다. 하나하나 챙겨주던 아내는 병실도 못 와보고, 발만 동동거렸다. 간병사가 누군지 모르니, 얼마나 신경 쓰여 그런 말 했을까.
간병사는 자상했지만 필요한 때는 엄했다. 뇌를 다친 환자라며 내가 한 걸음만 떼도 따라붙었고, 거리가 좀 된다 싶으면 휠체어를 태웠다. 간병사는 병원의 시계처럼 분명하고 정확했다. 2주 넘게 얼굴 한 번 못 본 아내가 병원 근처에 들를 일이 있어 2층까지 왔다고 전화 걸었다. 나는 단 몇 초만이라도 보고 싶어 간병사에게 알렸다. 선명하게 선을 그었다.
“병실 밖은 못 나가세요.”
숨이 막혔다. 아내는 내 목소리라도 들었으니 됐다며 돌아갔다. 그 순간, 학창 시절 ‘규율부장’이 떠올랐다.
병원 밥을 먹은 지 3주가 넘어가면서, 밥상 받을 때마다 힘들었다. 양념이 약하게 조리된 환자식은 억지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건강할 때라면 2~3분이면 뚝딱 해치웠을 양을, 10분도 걸렸고, 20분 넘게도 먹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다 겨우 먹기도 했다. 그것마저 못 다 먹고 남기기 일쑤였다.
여의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어느 봄날, 고교 동창 민성대가 전화 걸었다.
“병원 밥 먹기 지겹지? 맛있는 거 사줄까?”
친구들 사이에서 '미식가'로 통하는 그다. 여의도 K은행에서 오래 근무했으니 여의도 맛집을 손바닥 보듯 꿰고 있었다. 잠시 후, 깜찍한 문자가 왔다.
“메뉴 골라 보세요. 1. 어복쟁반 2. 생선구이 3. 바싹 불고기 4. 해초정식 5. 초밥 6. 양지설렁탕. 토요일 휴무가 많아 미리 정하려고요.”
어느 하나 놓치기 아까운 메뉴다. 니 역시 한 세월 여의도에서 근무했으니 어느 식당인지 단박 감이 왔다. 상상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전화가 왔다.
“토요일 저녁 6시, 차 가지고 갈게. 벚꽃길 드라이브하고, 저녁 먹고 병원에 데려다줄게.”
예상 못한 제안에 우물쭈물하니까 친구는 웃었다.
“이 형아 믿고 따라만 와.”
학생 때 장난기가 여전했다. 이 엉뚱한 제안에 나는 살아 온대로 답답하게 굴었다. 간병사에게 고지 곧 대로 친구 말을 그대로 전하고는 눈치 살폈다.
“외출 시간이라도 병원 밖은 못 나갑니다. 그렇게 나가고 싶으면 퇴원하세요.”
찬바람이 '쌩' 불었다. 퇴원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바로 꼬리 내렸다.
목요일 저녁, 친구에게 전화 걸어 사정을 털어놨다.
“간병사에게 물었더니 안 된다고 하더라.”
친구는 껄껄 웃었다.
“당연하지. 그냥 슬쩍 나와야지.”
토요일, 민성대와 또 다른 친구 이맹우가 함께 왔다. 성대는 딸이 골라준 커피를 보온병에 담아왔다. 85도에서 커피가 가장 맛있다며 그 온도에 맞춰 끓여 왔단다. 따끈한 커피를 마시니 가슴마저 따뜻해졌다. 삭막한 병원 2층 로비였지만, 친구 얼굴들이 봄꽃처럼 피어났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간병사 이우미선생님과 말을 나누게 됐다. 부모님을 10년 넘게 돌보다가 간병 일을 하게 되었고, 시작한 지는 3년 되었단다. 그가 들려준 기억은 오래 남았다.
" 아버지 뻘인 90대 초반 할아버지를 간병해 드린 적이 있어요. 할아버지는 알츠하이머를 앓는 할머니와 둘이 사셨대요. 10년 동 안 아내를 돌보셨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 뒤로 그 집을 못 떠나시고 홀로 사시다 암에 걸리셨어요. 자식 들은 제각기 살기 바쁘고, 친구들은 거의 다 돌아가시거나 거동을 못하셨답니다. 무척 쓸쓸해하셨어요. 할아버지가 퇴원하고부터 한, 두 달에 한 번씩 점심을 함께했는데, 늘 고마워하셨지요."
간병사의 가장 큰 일은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아닐까. 하루 종일 병실에 갇혀 지내다 보면, 마음을 나눌 상대가 절실해진다. 나는 SNS라도 하지만, 스마트폰조차 다루지 못하는 노인 환자에게는 간병사가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말벗이 된다.
간병사 이야기를 들으니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1년 전, 요양등급 4급 판정을 받아서 요양사의 방문서비스를 받으셨다. 요양사 김용순 선생님은, 어머니께 가족 같은 분이었다. 산업재해를 당한 남편을 돌본 경험 덕에 환자를 잘 이해했고, 한때 갈빗집을 운영한 솜씨로 어머니 입맛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어머니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95세의 어머니는 친구나 말 벗아 거의 없었다. 우리 가족들은 다들 바빠 시간을 자주 내지 못했다. 김 선생님은 집안일을 마치면 어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90 평생 살아온 이야기를 한없이 풀어놓았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어머니가 주방일을 하다 넘어져 척추 골절로 입원하셨다. 입원하면 요양사를 둘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간병사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김 선생님께 부탁했다.
“하루 한 시간만 문병 와주세요. 어머니가 선생님을 너무 좋아하셔서 치료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김 선생님이 오면 손목을 꼭 잡고 말씀 나누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김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 어머니와 좀 더 말씀 나누어드리지 못한 죄스러움에 눈물이 났다. 돌아가신 날 아침에도, 어머니는 김 선생님 손을 꼭 잡고 이야기하셨다.
어머니께 김용순 선생님은 요양사 이상의 존재였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 원 없이 하셨을 게다. 그 만남이, 어머니 생의 마지막 봄날이었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때,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병실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 안을 데운 건 사람의 목소리였다.
말벗이 있다는 건,
세상에 아직 내 편이 있다는 뜻이다.
내 목소리 들어주는 그대,
꽃보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