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끝에서, 다시 삶을 배우다
죽음이 스치자 욕심이 사라졌습니다.
발을 헛디뎠다. 그 한 발에 내 인생길이 바뀌었다.
그때야 알았다. 내가 붙들고 있던 건 삶이 아니라 욕심이었다는 걸.
죽음이 스쳤다. 한순간에 삶의 리스트가 허공에 흩어졌다.
그제야 알았다. 버킷리스트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살아내느냐를.
“형님, 지금도 버킷리스트 같은 게 있나요?”
같은 성당의 80대인 디모데오 형제와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무심코 물어봤다.
“버킷리스트요? 이제는 없습니다. 그저 평화롭게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담담했던 그 말이 내 가슴에 오래 남았다.
지난 3월, 취재 중 낙상해 외상성 뇌출혈로 42일을 입원했다. 우연히 형제도 얼마 전에 담낭 수술을 받았다. 큰 고비를 넘긴 공통의 경험이 서로의 마음을 열어 주었다. 삶이 크게 흔들리고 보니, 더 오래 산 분의 흔들린 속내가 궁금했다. 형제의 대답은 내게 다른 질문이 되었다.
"인생의 마무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죽음의 문턱을 밟고 돌아온 뒤, 죽음이 더는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의식을 잃고 피 흘리며 누워 있던 중환자실 침상에서 깨어난 뒤,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그 침상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났을까. 삶과 죽음은 같은 길의 다른 얼굴이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이 버킷리스트다. 정년 즈음이면 너나 할 것 없이 적어본다. 나도 퇴직 무렵 몇 번이나 고쳐 썼다. 하고 싶은 일과, 가보고 싶은 곳이 그리 많은 줄은 미처 몰랐다. 그때는 죽음이 멀리 있었고, 하고 싶은 일만 가득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음과 마주했을 때, 떠오른 것은 ‘못 해서 아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직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였다.
죽음을 생각하니, 삶의 가장 큰 버킷리스트는 ‘내 인생의 엔딩’이다. 사고를 당하고 나서야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귀에 새겨졌다. 아픈 사람이 그리 많았고, 가까운 몇몇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예외는 없다. 누구나 한순간 훌쩍 떠날 수 있으니 준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죽음은 모든 것을 가져가지 못한다. 떠난 이들은 여전히 가까운 이들의 마음에 머무르고, 각자의 삶은 저마다 발자국을 찍는다. 내 마지막을 지켜볼 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남길까. 내가 꾼 꿈을 간직해 줄 이나 있을까. 그저, 슬픔이 아니라 평화와 감사가 남겨지기 바랄 뿐이다.
라디오 PD 시절, 프로그램을 만들 때마다 고민했던 것 중 하나가 엔딩이었다. 모든 이야기란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기 마련. 완벽한 끝맺음보다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를 택하곤 했다. 때로는 질문으로, 때로는 새벽 해처럼 떠오르며 마쳤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니까.
내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조용한 방 한편, 문 틈으로 새벽빛 한 줄기가 들어온다. 나는 그 빛을 바라보며 천천히 나아간다. 시작하듯, 평화롭게 마무리하기. 내 버킷리스트의 마지막 한 줄이다.
죽음을 지나오니,
삶이 다시 나를 부른다.
그 소리 들릴 때마다
삶을 다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