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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나니 내가 보였네

버림 끝에 남은 허무와 성찰

by 김승월
버린다는 건, 치우고 끝내는 걸까?
새롭게 시작하는 걸까?


이사가 던진 질문


"어쩌다가, 아직도 더블베드 쓰세요? 적어도 트윈베드는 써야지. “

집을 줄여서 이사 가는데, 퀸사이즈 침대가 못 들어갈까 봐 걱정이라고 했더니, 사우 J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나이에는 각 방에서 살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각 집에서 살면 더 좋겠지만!"

어쩌다 보니, 나는 아직도 더블베드 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그동안 고생했다며 여동생이 사준 침대다. 크지도 작지도 않아서 별생각 없이 그리 살았다.


생각 없이 살던 내 모습을 이사 준비하면서 살펴보게 되었다. 야트막한 야산 기슭에 자리한 상암동 월드컵 파크 아파트에 살았다.

"콘도 같아요."

집에 들른 사람마다 인사차 그리 말하곤 했다. 봄이면 꿩이 울고, 여름에는 맹꽁이가 울었다. 비 오는 날이면 창문을 열고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즐겼다. 정든 집을 떠나서, 사무실까지 걸어 다닐 만한 집을 찾게 되었다. 가격에 맞추다 보니, 집을 대폭 줄일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딸은 내게 짐 30%는 버리란다. 요즘엔 작은 집도 드레스 룸은 있지만 서재는 없다며 책부터 치우란다. 그 귀한 걸 어떻게 버리냐고 버티니 딸이 압박한다.

"읽지도 않잖아요. 버려도 버린 줄도 모르면서. 지난 이사 때, 광에 있던 책 박스를 엄마랑 버렸는데, 안 찾으시던데요."


의문이 풀렸다. 지방 취재 다닐 때, 어렵게 구해서 모아 두었던 여러 지역의 '군지郡誌' 박스다. 내 눈앞에서 버리면 다시 주워 오곤 하니까, 나 몰래 내다 버린 것이다. 언젠가 찾아보니 안 보여서 이상하다고만 여겼다. 책을 끼고 사는 척했지만, 읽지도 챙기지도 않은 셈이다. 여동생과 조카도 이삿짐을 싸러 와서 보탰다.

“이제는 모두 버리고, 편하게 사세요. “


책을 버리니, 꿈도 접혔다


내세울 만한 나의 소장 도서는 라디오 제작 관련 책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라디오 책은 많지 않다. 한 때는 국내에서 나오는 라디오 책은 죄다 사 모았다. 외국 출장 갈 때, 서점에 들러 구한 적도 있다. 아마존에 주문 넣기도 했다. BBC 라디오 PD 플로우라잇에게서 몇 권의 책선물도 받았다. 그러다 보니 20여 권의 외국 책을 갖게 되었다.


지금 강의 나가는 인하대의 도서관에 기증 의사를 밝혔다. 10년 지난 책은 안 받겠단다. 도서관도 보관 장소가 좁아서 해마다 오래된 책은 처분한다고 했다. 내 책은 거의 다 10년이 넘었다. 해묵은 책이지만 귀중한 자료라고 설득하니, 외국서적만큼은 검토해 보겠단다. 17권의 책을 보냈더니, 8권만 받았다. 그것도 많이 받은 거라며.


인하대에 보냈던 라디오 관련 원서들

챙겨보니 방송자료도 꽤 나왔다. 지방 풍물을 소개하는 라디오 다큐멘터리를 10년쯤 만들었다. 전국 웬만한 곳은 다 누비고 다니며 그 지역 명사들과 인터뷰했다. 카세트테이프가 사과상자로 한 상자만큼 나왔다. 은퇴하면, 다시 들어보고 여행기를 펴낼 꿈을 꿨었다. 이제는 가망 없다. 서지학을 하는 분과 선이 닿았다.

"각 지역의 명사, 전문가들과 인터뷰했어요. 지금은 거의 다 돌아가셨을 분들의 육성입니다."

귀한 자료가 될 것 같다며 가져갔다.


피터 레온하르트 브라운


국제 피처회의에서 만난 독일 라디오의 대가 피터 레온하르트 브라운. 그는 국제피처회의에서 해마다 발표한 라디오작품의 대본과 CD를 다섯 해에 걸쳐서 보내주었다. 김현수 MBC 라디오국장에게 그 자료 기증의사를 밝혔다. 양이 얼마나 되냐고 묻길래, 사과 한 상자 정도라고 줄여서 답했다. 더러는 덜어내고, 사 모아둔 외국방송 CD를 보태서 한 상자에 담아 보냈다. 내가 하려던 말을 김국장이 내게 먼저 했다.

"라디오 본부 벽장에 넣어 PD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아마 듣지 않을 거예요. PD들에게 자극이 되면 좋겠습니다."


기념품과 상장도 허무하게 흩어지다


자격증, 졸업장, 감사장, 상장은 커버를 뜯어내 버리고 알갱이만 남겼다. 감사패, 기념패도 더러는 내다 버렸다. 내 소유물은 내게 물건 그 이상이다. 하나하나에 내 삶이 스며있다. 지닐 수 없게 되었으니, 누군가에게 주어야 한다. 내게는 소중하지만, 남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받아도 언젠가는 버릴 게다. 아쉬워하는 나에게 아내가 위로했다.

"하늘로 이사 갈 때는 몸뚱이도 버리잖아요."


버림은 또 다른 시작이다


짐을 치우고 나니 한순간 허전해졌다. 애써 살아온 내 흔적이 지워진 듯하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 왕의 탄식이 가슴에 와닿는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코헬렛 1:2)


비운 공간에 먼지가 내려앉는다. 세월 가면, 먼지 더미에서 새순이 돋아 나지 않을까. 햇살이 비춘다. 비움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버리고 나니 허무가 보였고,

허무 속에서 내가 보였다.

비움이 다시 나를 채웠다.


Joel & Jasmin Førestbird on Unsplash


브런치북《병상에 누우니 보이네- 지나가고 나니 보이는 것들》,

다음화는 저를 위한 주례사, '주례를 위한 주례사'가 이어집니다.



* 이 글은 MBC 퇴직 사우들의 신문 MBC 사우회보 2024년 7월호에 기고한 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를 다듬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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