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하나 붙들고 살았습니다

세월 가니 보이네 ㉖

by 김승월

“어떻게 결혼 생활을 하면 좋을까요?”


‘시각을 넘어선 와인 시음회’에서 시각장애인 소믈리에 최은영에게 한 참여자가 물었다. 예비 신랑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최은영은 올해 쉰 하나다. 스물아홉에 시력을 거의 잃었고, 마흔둘에 결혼했다. 쉽지 않았을 결혼 생활에서 그가 찾은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작은 일을 잘해주면, 큰일이 생겨도 잘 넘길 수 있어요. 여자는 작은 것에도 감동받아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대개, 대단한 감동이 아니라 사소한 장면 하나에 기대어 살지 않을까.


아내와 가까운 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예순 가까운 아버지가 어머니를 잃고 난 그해에 재혼하자 딸은 서운해했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데도 새엄마가 아버지의 회갑연을 번듯하게 준비해서 속상했다. 그렇게 쌓인 야속함을 견디게 한 건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밤, 아버지는 집에 놀러 온 친척 아이를 업고 눈길을 걸어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딸은 눈 속에 발목까지 푹 빠지던 그날의 밤길을 따라기며, 아빠를 다시 보았다. 그날 이후, 딸은 ‘우리 아빠는 착한 분’이라는 믿음 속에 살았다. 아버지가 야속할 때마다 그 장면이 떠올랐고, 그 기억 때문에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었다.


고등학생 때였다. 시골에서 서울 양장점에 취업하러 가는 장애인 소녀와 버스를 함께 탄 적이 있었다. 이웃 아주머니가 길 안내를 부탁해서다. 의족이 없던 시대여서 쟐린 다리를 보고. 긴장해서 말을 나눌 수도 없었다. 목발을 짚은 그녀에게 내가 해준 일은 강북의 어느 동네까지 길을 안내해 준 것뿐이었다. 나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장애 소녀에게는 오래 남은 장면이 되었나 보다. 그 소녀가 고마움에 감동받았다는 말을 이웃 아주머니를 통해 여러 차례 전해 들었다.


쪽지 하나가 마음을 붙들기도 한다. 한글을 막 깨친 딸아이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색종이에 ‘아빠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삐뚤삐뚤 써서 주었다. 내 딸에게서 받은 첫 편지였다. 말 배우기 시작한 딸아이가 ‘아빠’ 소리를 처음 했을 때 들은 느낌이 되살아 났다. 한동안 책갈피에 끼워두고 보고 또 보았다. 자라면서 딸아이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질 때면 그때의 내 마음을 떠 올 리 곤 했다.


2000년 전후, MBC 라디오는 압도적인 청취율 1위였다. MBC표준 FM과 음악 FM의 점유율을 합치면 50퍼센트가 넘었다. 당시 톱 10 인기프로그램 대부분이 MBC 프로그램이었다. 그 시절 MBC 라디오는 ‘감동과 재미’를 추구했다. 사람들은 결국 감동에 머문다,


그때나 지금이나 감동받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있을까. 감동은 크든 작든 오래간다. 누군가는 눈 내리던 밤의 아버지를 붙들고 살고, 누군가는 쪽지 한 장을 책갈피에 끼워놓고 견딘다.


굴곡진 인생길을 가려면, 저마다 작은 감동 하나쯤 붙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함께 가는 그 사람들에게 작은 감동 하나라도 건넸는지 나를 돌아본다.


브런치북 <세월 가니 보이네>

다음 주에는 편견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함께 해주세요.


김승월의 브런치북에서는 '겪고 나서 깨달은 이야기,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 들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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