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가니 보이네 ㉕
오래 보다 보면 느낌이 달라지기도 한다. 잎을 모두 떨군 빈 가지가 허공에 드러난 겨울나무는 쓸쓸해 보인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면 다른 게 눈에 들어온다. 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구름이 지나가고, 햇살이 스민다. 나무는 앞에 서지 않는다. 비켜서있을 뿐이다. 그 자리에 하늘이 들어온다.
나는 한때 강의에서 인생 이야기를 자주 했다. 인생은 하나의 면이 아니라, 여러 면이 함께 있는 다면체라는 것을. 빛나는 날이 있고, 어두운 날이 있다고. 드러내고 싶은 얼굴과 감추고 싶은 얼굴이 함께 산다고. 그 말은 학생들을 보고 했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나를 향해 돌아왔다.
살다 보니 한 가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순간이 많았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 부담이 되기도 했고, 보람 있던 일이 어느 날은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들떠 있다가도 금세 마음이 내려앉았다. 조금 물러서면 으레 다른 면이 보였다.
계절도 그렇다. 겨울이라고 늘 매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찬바람이 멎고 따사로운 햇살이 머무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의 겨울은, 봄에 가까워 보인다. 봄에도 꽃샘추위가 찾아온다. 펴지던 마음이 잠시 움츠러들기도 한다.
내 어린 시절이 그랬다. 세상은 새로웠고, 나는 호기심이 많았다. 분명 봄 같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고, 마음이 작아지던 날도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있었고 형제자매가 있었다. 그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마음은 끝내 얼어붙지 않았다.
여름이라 부를 시절에는 뜨겁게 살았다. 하고 싶은 일을 붙들고 버텼다. 지치기도 했고, 돌아가고 싶었던 날도 있었다. 가을이라 부를 나이에도 봄 같은 하루가 있었고, 겨울 같은 저녁도 있었다. 돌아보면, 한 계절로만 부르기에는 다채로운 시간들이다.
이제 나는 겨울 어귀에 서 있다. 잎은 거의 남지 않았고, 바람을 가릴 힘도 예전 같지 못하다. 그 대신 전보다 하늘이 넓게 보인다. 예전에는 스쳐 지나가던 것들이, 요즘은 오래 눈에 머문다.
불암산 요셉수도원 이수철 신부의 책 『사랑 밖에 길이 없었네』에서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가난한 겨울나무가 아름답다.”
그 문장을 읽고, 오래 생각했다. 잎을 다 떨군 나무를 나는 그동안 애처롭게만 보았던 건 아닐까. 조금 비켜 보니, 그 나무가 다르게 보였다. 오히려 너그럽게 보였다.
자연의 계절은 어김없이 바뀐다. 마음의 계절은 겹쳐 지난다. 겨울 한가운데서도 봄빛이 스미고, 봄날에도 찬 기운이 감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겨울이라 해도, 그 안에 봄빛 하나쯤은 스며 있지 않을까.
김승월의 브런치북에서는 '겪고 나서 깨달은 이야기,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 들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